선한이웃교회 마음의 창
매 주말마다 주일예배를 앞두고 묵상을 하면서 마음의 창을 통한 짧은 칼럼을 남기고 있다. 묵상의 끝에 드는 질문은 ‘잘 살고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 자신을 비롯한 우리들 각자는 잘 살고있는 것일까?
문뜩 잘 사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떠 올려보았다. 부자로 장수하는 사람, 베풀고 나눌 줄 아는 사람, 부와 명예를 가졌고 겸손하기까지 하여 덕을 끼치는 사람, 선한 일에 힘써서 존중받고 인정받는 사람, 유명한 명성과 함께 많은 친구가 있는 사람, 신앙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 등등 생각이 난다.
그러던 중, 아무리 외부나 내부적인 조건이 좋아도 당사자가 행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누가 보아도 남부럽지 않고 사지 멀쩡하고 멋지고 이쁜데 행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필자의 젊은 날에 남궁옥분 씨의 “꿈을 먹는 젊은이” 노랫말이 생각이 난다. ‘행복은 언제나 마음 속에 있는 것 / 괴로움은 모두 저 강물에 버려요 / 사랑과 욕망도 모두 마셔버리고 / 내일을 위해서 젊음을 불태워요’ 지금 생각하면, 가사의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이 될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행복은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이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주어지는 환경과 여건 그리고 굽이치는 마음의 흐름을 보면서, 깊이 있게 통찰한 것이 하나로 조합이 된 것이 있다. 지난 2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묵상과 생각의 끝을 페이스북에 공유했었다.
지난 삶을 되짚어보니, 나는 행복한 사람임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이유는 나는 행복한 일이 생겨서 행복했던 것이 아닌 행복하니까 행복한 일들이 주어졌던 것이다. 복 있는 사람(Blessed), 즉 하늘의 복을 가졌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고~ 또한 그러기에 행복한 일들이 오늘 나의 삶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라 믿는다.
오늘 현재를 사는 필자의 관점에서 가장 잘 살고있는 사람은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행복을 위협하는 가장 큰 무기는 아마도 비교가 아닐까 생각을 겸한다. 하지만 행복은 환경과 여건, 태생과 신분, 혹은 가난하거나 부함에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늘 확신하는 한 가지는 그 행복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내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근거, 그것은 내 안에 중심되신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간 유튜브에서 “극한직업”이란 제목 아래 필리핀에서 바나나가 수확되고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한화로 1개월 월급이 8만원이 안되는 돈을 받고 노동자해서 보내준 것을 먹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깊게 깨달았다. 돌아보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전적인 은혜라고 생각된다. 먹는 것 가지고 고민하거나 고통받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 환경과 여건 & 생각 또한 다양할 것이다. 다만 보편적인 관점에서 현재는 먹는 것보다는 배설을 고민해 보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일명 input & output의 원리를 따라 먹는 것과 배설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 배설에 대한 묵상 속에서, 우리들의 영혼육 안에서도 건강한 배설이 필요함을 느낀다.
우리의 육체(Body)는 적당량의 음식물이 들어가면, 소화기관의 절차를 따라 크고 작은 배설을 해야한다. 필자는 소화기관이 가장 연약한 부분이다. 하지만 요즘은 주님의 은혜로 잘 먹고 잘 소화시키고 있다. 몸무게가 인생의 최고점을 찍은 것이 그 증거이다. 화장실에서 몸속의 쓰레기를 배설할 때는 기쁨과 감사가 합창을 하는 시간이다.
육체가 몸속의 쓰레기를 버려야 하듯이, 우리의 감정 혹은 정신도 정기적인 배설이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혼(Mind/Soul)과 관련하여 우리의 정신은 감정을 동반했기에 일상에서 쓰레기들이 쌓인다는 논리이다. 심리상담가들이 줄 수 있는 도움이 이 부분일 것이다.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 고민해 보았다. 건강한 소그룹 모임이 좋은 것 같다. 경험해 보니, 우리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목장모임이 좋다. 서로가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알고 연약한 부분까지 오픈(쏟아냄)해도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육체와 정신이 가진 쓰레기처럼, 우리들의 영(Spirit) 또한 쓰레기가 쌓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아담을 창조하신 이후로 인간에겐 호흡과 함께 생령이 주어졌다.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공간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 주의 영이 가득하면, 평안해진다. 하지만 비어있으면 공허하고 쓰레기가 차면 타락하고 죄를 짓는다. 영적인 배설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현재 필자의 해안은 기도함으로 해결하고 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 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 사함을 너 받으라”
(마11:28)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필자는 기적을 믿는다. 혹자는 초대교회에 있었던 온갖 기적과 성령의 역사로 인한 계시는 끝이 났다고 한다. 그 혹자의 신앙과 신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원하는 모든 것에 응답해 주시지 않았을 뿐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보여진 놀라운 기적은 평범한 일상보다는 고난의 때에 체험한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경험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홍해 앞에서 결코 상상하지 못한 바다에 생긴 길을 건넜다. 하나님께서 때와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서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홍해 길을 건넌 것은 결코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없다. 수많은 기적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이루셨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 볼 때만 보일 뿐이다.
홍해 길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길을 경험했다. 문제는 자신들이 걸었기 때문에 그것이 광야의 길인지를 모를 뿐이다.(단 첫 발걸음을 내딛은 사람은 알았다.) 길은 사람이 다니는 곳이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 미디안 광야는 사람들이 걷는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걸어야 했고 머물러야 했다. 그렇게 38년을 다니니 길이 생긴 것이다.
끝으로 사막의 강이 있는 것도 도무지 불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만약에 강이 있다면, 그곳은 더 이상 사막이라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의 해석은 광야와 사막을 지날 때 만나는 아주 작은 오아시스라도 그것은 갈급한 사람에게 있어서 강과 같은 기적일 것이란 생각이다. 홍해 길과 광야 길을 지났던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땅에서 만난 물은 강물처럼 생명의 원천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생명이 있는 곳에 기적이 있기에~
최근 필자는 일상에서 기적들을 체험하는 듯하다. 일상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눈을 뜨고 나니, 홍해 속에 길이 있고 광야 위에 길이 있으며 막막한 사막에 흐르는 강물이 보이는 듯하다. 이런 믿음이 서니,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은혜와 용기가 더욱 생기는 것 같다. 이 길을 걷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기적을 많이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마13:58)
어느 덧 50 중반이 되었다. 뒤돌아본 삶의 여정 속에 수많은 질문과 과정 그리고 결과들을 보았다. 그런 중에 나름의 깨달음과 해안이 생겨진 것도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일까? 젊은 세대에게 기회가 되면 뭔가를 말해 주고 싶어하는 오지랖이 보이곤 한다. 그것이 라떼가 되어 간섭 혹은 잔소리가 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할 말이 많아질 때, 그 때 최소한의 말로 압축하여 조언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한다.
지난 삶의 여정을 3가지 표가 정리해 보고자 한다. 물음표(?)와 느낌표(!) 그리고 마침표(.)이다. 수많은 질문을 가지고 갈팡질팡 했던 시간도 있고 잘못된 길을 걸으며 혼란 속에서 어두운 경험도 해 보았다. 특히 젊은 날에는 질문과 물음이 가지치기를 하면서 더욱 방황의 열기가 뜨겁기도 하였다. 이 현상은 모태신앙을 가진 본인에게 그대로 이어졌고 단순하고 당연한 믿음이 온통 물음표로 바뀌어 탕자처럼 살기도 하였었다.
그런 여정 속에 확실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방황과 혼돈의 끝이 절망이나 실패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수많은 질문과 물음에서 답을 찾고 해안이 열릴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신묘막측(神妙莫測: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영묘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 때 느껴지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와우! 어떻게 이런 일이! 하나님이 진짜로 나와 함께 하시네! 주님께서 신실하십니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에게 진리는 그 가치를 발휘하고 참 생명이 되는 것임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
물음표와 느낌표가 경험되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과 신앙에 대한 결단이 서는 것이다. 그 결단은 마침표를 찍으며 결심으로 서게 되는 듯하다. 과거의 갈팡질팡이나 세상의 미련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 생기기도 한다. 불확실에서 오는 불안도 느낌표로 경험한 하나님으로 인하여 담대함으로 자리 잡는다. 가장 큰 마침표는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생의 끝 이후에 예비하신 천국이 마침표로 찍혀 있으니 믿음의 마침표로 할렐루야~
본인은 목회자이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갈망하고 있고 왜 우리 공동체에게 응답해 주시지 않느냐고 물음표를 올린 날이 무수하다. 그런 중에 목회의 여정 속에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영혼들을 세우신 Amazing(놀라운)! 하신 주님을 보았다.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뀐 현재 필자에겐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여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어 천국가는 성도의 삶을 인도하는 목회자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를 소원한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신문을 보던 남편이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이것 좀 봐. 여자들이 남자보다 2배나 말을 많이 한다는 통계가 실렸네! 남자는 하루 평균 1만5천 단어를 말하는데, 여자들은 3만 단어를 말한다는 거야!” 이 말을 들은 아내가 말했습니다. “남자들이 워낙 안 들으니까, 여자들은 늘 똑같은 말을 두 번씩 하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두 배지!” 3초 후에 남편이 아내를 향해 물었습니다.
“뭐라고?” 저도 아내에게 종종 “당신은 내 말을 잘 흘려들어요.”하는 핀잔을 듣습니다.
훌륭한 상담자는 어떻게 해보라고 말하기 보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진득하게 들어줍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한스 스트럽(Hans Herrman Strupp, 1921-2006)은 “내가 보기에 간단하면서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진실 한 가지는 문제가 신경성, 우울증이든 아니면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든 그 문제를 누군가 신뢰하는 사람한테 털어놓으면 기운이 나아진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만이나 갈등이 있을 때, 그 내용을 표출하기만 하면 불만의 원인 자체는 해결되지 않아도 불만의 90%가 해소된다는 하버드 대학의 연구 결과는 경청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저는 실제로 여러 어르신들을 상담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1시간 반 내지 두 시간 동안 어르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나중에 “오늘 상담 어떠셨어요?”하고 여쭈면 “속이 다 후련하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고마워요.”하고 대답하십니다. 제가 한 말은 오직 어르신 이야기 하시는 것을 들으며 ‘그러셨군요’, ‘그래서요?’ ‘저런!’ ‘정말 대단하세요’ ‘정말 마음 아프셨겠어요.’라고 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경청'은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들으면 눈빛부터 달라집니다. 반짝반짝 빛이 나고 때론 미소가 때론 눈물이 고입니다. 말 한 마디, 손짓 하나하나에도 진심이 통합니다. 건성으로 듣지 않고, 진심으로 잘 듣는 것이 사람을 얻는 길인데, 그걸 놓치고 사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제논은 “귀나 눈은 두 개인데 입은 하나인 이유는 많이 듣고 보는 대신 말은 적게 하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말하고 있으면 남이 이득을 얻고 듣고 있으면 내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라는 아라비아 속담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친구를 잃고 귀로 친구를 얻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소통의 문제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만 강조하고 부각시키려는 데서 생겨납니다. 경청은 “당신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믿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다”라는 것을 말없이 말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 금요일에는 철야 기도회로 모였습니다. 공동 기도제목을 놓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기도 제목을 놓고 통성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원에 가면 더했습니다. 주님께서 말하실 틈을 주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기도는 쉬지 않고 말하는 것보다 이미 우리의 마음과 필요를 아시는 세밀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의 첫 번째 요건은 경청입니다. 믿음의 첫 바탕 역시 경청입니다. 쉐마! 코람 데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야고보서 1:19)”
25년을 사역자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발견한 것은 모두 각자의 개성 속에 다르다는 것이다.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그렇게 많은 만남 속에 다른 정도가 심각할 때는 관계의 단절까지 오게 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그런 지난 사역의 여정 속에서, “필자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품어서 상생할 수 있을까?” 생각은 목회자로서 크나 큰 과제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아울러 그 사역의 현장 속에서, 설교자로서 동일한 성경을 매년 통독하고 설교하면서 “어떻게 다르게 접근할 수 있을까? 또한 과제 중에 하나이다.
그런 고민 중에 수많은 책 속에서 주는 메시지처럼 생각과 사고의 전환 혹은 발상의 전환을 가져볼 도전을 실천해 보았다. 예를 들어, 필자는 오른손잡이지만 왼손으로 숟가락이나 젓가락 질을 시도해 본다. 처음에는 무척 곤란할 정도로 어색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지금은 양손잡이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시도하는 것은 산책 중에 첫 발을 땔 때에 항상 오른발이 먼저 나가는 것을 의도적으로 왼발로 바꿔보기도 했다. 의식하지 않으면 이것은 바뀌어지지 않을 듯싶다. 이런 도전은 화장실에서도 오른손 사용을 왼손 사용으로 바꿔 보기도 한다. 아주 많이 어색하다.
이런 시도들 속에서 오늘 필자가 배우는 것은 그마만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불편함과 반복 속에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 상생하려면, 우리 각자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각고의 노력과 시간 속에서 생각이 바뀌니, 사고의 변화가 생기고 발전하니, 역발상으로 직면한 문제를 푸는 지혜도 얻고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이해 못할 사람이 줄어드는 것만 같다. 다만 관계의 지속성이나 깊이는 한계가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사고의 전환이 준 역발상은 주어지는 고난이나 환란까지도 유익하게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누리고 있다.
나 자신이 소중하듯 나와 다른 각각의 사람도 소중하다는 마음으로 성도를 보며 섬기려고 한다.
주를 위한 삶으로 헌신을 다짐한 후 28년째 해를 살아가고 있다. 신학 과정을 밟으면서 사역을 한지도 25년이 흐른 것이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가장 많은 논쟁있고 화제가 된 주제는 천국과 지옥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지옥이란 주제보다는 천국을 훨씬 많이 다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지옥은 믿음의 유무를 떠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질문은 “천국은 과연 있는가?”이다. 죽어서나 확인 가능한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이들이 다수이다. 재미난 것은 누구든지 “지옥에나 가라”는 소리는 매우 듣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일단 전 세계 인류 문명 속에 남아있는 전설이나 이야기를 보면,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아 최소한 인정은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 질문은 천국이 있다면, “어떻게 & 어떤 사람이 가는가?”이다. 모든 종교가 가진 공통점은 악인은 안되고 의인, 즉 선한 사람이 간다는 것이다. 선행을 많이 행하는 것이 공통분모인 것이다. 물론 성경도 선행을 강조한다. 하지만 특별히 다른 부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요1:12)
그리고 실천적인 선행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단서가 있다.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이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에 ‘값싼 은혜 혹은 값싼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 같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마음과 입술로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자녀된 권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 권세를 가진 자가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마7:21)
80억 세계인구를 논하는 시대 속에서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대한다. 각자의 취향과 성격이 그마만큼 다양해짐 때문일 것이다. 그 다양성에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또한 각양각색이다. 물론 필자도 중요하게 여기는 세 가지 상이 있다.
첫 번째는 그 누구도 부정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밥상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필자는 생존과 행복을 주는 밥상이라고 답할 것이다. 노벨상이나 우등상보다는 밥상이 우선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 주신 밥이 최고였고 결혼하고 아내가 해 주는 밥이 최고이다. 아침에 주어진 밥상과 저녁에 주어진 밥상은 주어진 삶 속에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의 결단을 지속할 수 있는 원천이다.
두 번째는 우리 모두가 보고 사는 인상이다.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마음과 인생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관상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시하는 입장은 아니다. 수많은 세월 속에서 얼굴 형태가 보여준 데이터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람을 볼 때, 얼굴을 비교적 많이 보는 편이다. 잘 생기고 이쁜 사람이 보기 좋고 마음 쉽게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인상이 좋은 사람이 말도 이쁘고 바르게 한다. 또한 마음이 따뜻해서 모난 이웃도 품고 이해해 주는 듯하다.
세 번째는 당연하지만 결코 당연할 수 없는 일상이다. 세월이 흘러 50대 중반이 되고 나니,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자는 것이 단순하지 않은 것을 고백한다. 특히 지난 2년간 코로나 기간 격리와 확진자로 격리했던 시간 후, 과거 지루할 듯한 뉴질랜드 생활의 일상이 결단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밥을 함께 먹고 한 공간에 모여서 담화를 나누며 예배당에 앉아서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상이 최고의 상이란 것을 깨달았다.
금상, 은상, 동상, 최우수상 등등 필자는 이런 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평생의 삶 속에서 장학금 면제의 영광을 본인은 너무 오래 유지하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하늘에서 주시는 은혜로 밥상을 받고 있고, 크신 은혜로 인상 좋다는 말도 들으며 살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탁월한 축복인 일상을 지금 이 시간도 받아서 살고 있다. 그런 나는 행복한 사람이고 최고의 상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는 어떤 상이 가장 중요한가? 생각의 집을 선물한다.
우리 가족은 2022년이 되면서 발전한 문명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다. 교회 차량이 교체되어 신세계이고 집에 스마트TV가 들어와서 다른 세계가 되었다. 특히 스마트TV는 우리 부부의 시간을 더욱 많이 빼앗아가는 듯하다. 무엇보다 Netflix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를 매료시킨다. 그렇지 않아도 책을 읽는 것보다 영상물을 좋아하는 필자에게는 유혹이 되는 정도의 차원이다.
지난 오미크론으로 인한 자가격리 기간 동안, 인상적이게 보았던 “the Final Table”이란 요리 경연 프로그램이 있다. 9개 나라의 음식을 경쟁하며 9명의 최고 요리사와 함께 10번째로 앉게 될 사람을 경연에서 뽑는 것이다. 참으로 흥미진진하였고 특별한 식당에서 볼 수 있는 고급 음식을 아주 많이 볼 수 있었다.
기억하기론 본 프로그램은 10주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1~4주 분량을 보고 나니 누가 1등이 될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스마트 기능을 사용하여 빨리 보기를 했다가, 그것도 만족스럽지 못하여 마지막 10주 방송분을 보고 최종 승자를 보았다. 스마트 시대가 가져다준 특혜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더 이상 궁금해서 답답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 중에 필자의 생각에 밀려드는 것이 있다. 디지털화 되기 전에 주말드라마 혹은 매일 연속극들을 보았던 기억이 떠 올랐다. 재방송이 없는 한 한번의 기회밖에 없는 본 방송을 긴장, 기대, 궁금, 상상으로 기다렸던 시간이 있었다. 특히 선택의 폭도 방송사가 극히 제한적이니 고민의 여지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디지털 시대에서 스마트 시대가 되면서 보고 듣고 알 수 있는 채널이 다양하여 홍수를 이룬다. 더구나 구글에 들어가 무엇이든지 궁금한 것을 찾으면, 답변을 시원하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최첨단 시대 속에서 필자는 걱정과 아쉬움이 생긴다. 이런 흐름이 말씀을 대하는 성도들에게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생각하며 실천하는 과정이 빠진 성경의 교훈과 해석만으로 다 알고 있는 듯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엿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약2:26)
필자는 많은 시간을 생각과 묵상과 연구를 비교적 많이 하는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연구는 주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게 되고 묵상은 QT를 하면서 곱씹는 듯하다. 그리고는 관련한 것과 인생사 속에서 생각이 주를 이룬다. 특히 최근 몇 일간은 감사일기를 쓰면서 주위에 좋은 사람이 참으로 많이 있음으로 감사를 기록하였다. 후에 생각해 보니, 나쁜 사람도 주위에 있다는 것을 인지 속에 인정하게 되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반적인 사람과 전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좋은 사람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는가? 자문해 보았다. 생각의 끝에 간략한 정리가 되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판단하는 사람의 생각과 삶의 결과에서 결정될 것이라 매듭을 지었다. 본인 같은 경우는 마음의 필터링을 거쳐서, 객관적으로 나쁜 사람들을 생각할 때, 그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고 눈앞의 이익에 눈멀고 인생을 보는 견해가 짧고 무지한 사람으로 본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정리한다.
반면 좋은 사람을 구분 짓는 관점이 있다.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은 그들이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인생을 멀리 볼 수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알아 양보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와 타인의 유익을 고려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물론 부족한 모습을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필자는 훌륭하고 귀감이 되는 부분을 보고 귀하게 여김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원리를 가지고 최근의 코로나로 인한 역경을 역전으로 바꾸는 묵상과 생각의 전환을 의지적으로 노력하며 시도하고 있다. 끝없이 자전하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지난 2년간 우리 모든 인류는 온몸으로 고통 속에 신음하였다. 그런 우리들에게 코로나는 분명히 나쁜 바이러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생각의 반전을 가진다면, 그 역경이 역전의 기회가 될 것이란 것이 필자의 논지이다.
얼마 전인가~ 오클랜드에 폭풍을 동반한 장마비가 내린 적이 있다. 몇 일간 강하게 부는 바람으로 위축되는 마음을 정리정돈해 보고자 교회에서 가까운 Ferry 선착장에 갔다. 그 바람이 부는 바다(수위는 최고 높을 때) 위에서 윈드서핑하는 남성을 보았다. 거친 파도와 험한 바람을 유일하게 즐기고 있었다. 믿음의 눈이 그 서핑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은 사람, 좋은 날씨, 좋은 조건 이 모든 것은 역전할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 같다.
필자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아내와 함께 경건의 삶 공부 과정 매주 정기적인 미팅으로 가지고 있다. 약 50여 전에 영성가로 전혀 손색이 없는 리처드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을 주 교제로 한, 삶 공부는 우리 부부에게 큰 유익을 주고 있다.
매 주 한 장의 매인 주제를 가지고 영적 훈련을 가지고 있다. 지난 번 주제로 ‘인도하심을 받는 훈련’ 부분에서 영적 인도자의 역할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저자는 말한다. “성령의 내적 가르침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정리해 주었다. 필자에게 주님께서 리처드 목사를 통해 주신 말씀처럼 들려졌다.
성령님께서 일하실 때는 다수결의 법칙보다는 일치의 법칙을 주신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메시지이다. 도움이 될 듯하여 책 내용 중에 일부를 그대로 인용해 본다. “성령은 주어진 사실과 반대 방향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고 혹은 일치하는 방향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다. 올바른 길이 선택되었을 때 성령은 일치의 정신을 심어 주시고,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올바르게 듣지 못하였을 때는 우리를 불안으로 괴롭게 만든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잇는다. “성령이 주시는 일치는 단순한 합의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인식이다.”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쳔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영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영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는 너무도 중요한 것이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영적인 삶에서 우리 교회공동체가 건강하고 건전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을 묵상하던 중에, 주어진 배움이자 깨달음을 주 안에서 함께 된 지체들과 나누고 싶어 이렇게 정리해 보았다. 무엇보다 필자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중심으로 영적 인도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싶다.
영적 인도자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고 그 성도가 일상의 삶에서 성령님의 내적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도록 돕고 격려하고 무엇보다 동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 글을 공유하는 당신이 누구든지... 우리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따라 일치의 법칙으로 하나된 형제요 자매임을 기억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이 있다. “거절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 짧은 소책자인데, 내용은 간단하지 않은 듯 상당한 임펙트가 있다. 우리 모두는 원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최소 하나 혹은 두 가지 이상은 있는 것 같다. 그 모습의 뿌리엔 거절(Reject/refuse)의 상처가 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런 상처가 뿌리에 있으면, 그 위에 자라난 나무와 가지들 & 열매들에도 어떤 형태로도 나타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책을 더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묵상 중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위로가 무엇일까?
지난 주일 설교 후, 한 주간 줄곧 생각을 거듭해 보았다.
27세에 결혼을 하고 나보다 똑똑하고 훌륭한 아내와 함께 부부로 살아온 날이 27년이다. 여전히 지난 27년을 돌아보아도 우리 부부는 화성과 금성에서 지구로 이주한 사람처럼 다르다. 이 지구에서 각각 예수님을 만나고 그 크신 은혜 안에 있으니 현재 부부로 서로를 멋지고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본인의 관점에서 그렇다.
서로 다른 우리들의 모습은 냉정하게 돌아보면, 가지고 있는 원래 성품이나 인성 혹은 가치관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느껴지는 한 가지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것 같다. 가지고 있는 인성의 색깔 또는 말하는 습관을 용납하고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그릇이 커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각자의 행성에서 가지고 온 마음의 그릇을 넓게 펴기 위해선 수많은 충돌과 다툼 & 연단들이 있었다. 그런 인생의 전쟁터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보았고,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수고/고생(hardship/trouble)를 알고 있다. 그리고 주어진 인생과 사역 속에 있는 고통(pain/agony)을 알고 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진짜 필요한 위로는 상대편이 가지고 있는 수고와 고통을 알아주고 인정만 해도 위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해결을 해주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필자도 어떤 때는 말로 설명하거나 행동할 수 없는 수고와 고통이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나를 이해해 주는 아내는 최고의 위로자인 것 같다.
요즈음 날씨를 보면, 한여름을 지나 가을에 접어든 것만 같다. 시원한 바람이 있는 날이 있으니, 설교를 준비하다가 혹은 일상을 마친 오후 산책하는 즐거움과 유익이 있다. 특히 최근의 산책에서 관찰된 것이 있다.
걷는 중에 자세히 보니, 많은 집들이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그 관리도 가지각색이다. 마치 각 정원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재력과 감성과 성실함의 정도를 나타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기억에 남는 집의 정원은 참으로 정감이 가고 그곳에 머무르고 싶은 충동을 가진다. 반대로 어떤 정원은 저것을 왜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보기 흉하다.
필자도 이곳 뉴질랜드 이민생활 21년 차로서 약 3년을 뺀 나머지는 렌트집을 살고 있다. 렌트집을 사면서 잔디와 작은 정원 관리는 줄곧 본인이 하였다. 그러다 보니 엉성한 정원도 나름의 관리를 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 영역에 전혀 관심과 재능이 없는 본인은 최소한의 정리정돈으로 집을 관리하고 렌트집에서 살고 있다.
그러던 중에 산책 때 보았던 많은 정원과 필자가 살고있는 집의 정원 그리고 다른 집들의 정원이 왜 각각 다른 모습일까? 질문과 궁금증을 가지고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본인이 현재 집을 관리할 때 자세를 정직하게 살펴보았다. 결과는? 주인의 마음이 아닌 렌트자(Tenant)로써 제한된 관리를 하며, 시간을 빼앗기는 마음과 자세로 임했던 모습이 자세히 엿보였다.
반면 모르긴 몰라도 관리와 정돈이 잘된 어여쁜 정원은 그 집을 아끼고 사랑하는 집 주인이 정성스럽게 가꾸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보았다. 주인의식이 주는 남다른 무게감이 느껴진다. 우리 가정도, 사업장도, 교회공동체도, 한 나라도~ 각종의 영역을 생각해 보니, 주인의식과 테넌트의 자세는 차이가 있겠구나 생각의 정리정돈을 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러 필자는 본인이 속한 교회공동체를 돌아보며, 나는 과연 공동체를 위한 마음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사명처럼 ‘성도를 온전케 함’을 위해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듯이 관리하고 있는가? 자문해 보았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 중에, 실제적으로 교회건물을 포함하여 사무실과 교육관, 특히 교우들 각자를 좀 더 유심히 돌보는 실천을 결심해 보았다.
처음 사람인 우리들의 조상 아담과 하와께서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었다. 그 결과 우리 인류는 그 자손으로 DNA를 가졌다는 이유로 죄의 사슬에 묶이게 되었다. 우리 입장에선 대단히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 죄로 인해서 우리 각사람은 죄가 다스리려고 호시탐탐 노리도록 노출되게 되었다.
죄를 다스리는 방법은 오랜 성경연구와 말씀 사역을 통해 확실한 답을 찾았다고 믿는다. 그것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약의 모세오경이 말씀에 순종을, 역사서는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선지서는 불순종에서 돌아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시가서는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았던 자들의 지혜와 찬양으로 보여진다.
죄를 다스리는 온전한 방법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 DNA를 가지고 좀 더 구체적으로 죄를 다스리려면 꼭 필요한 세 가지 모드(Mode)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자동항법장치(Cruise)와 같은 설정 모드라고 적용할 수 있다. 매일의 삶 가운데서 유혹하고 미혹하는 죄를 다스리는 방법을 소개한다.
첫째, 선악과 Free 모드이다. Smoke Free or Sin Free처럼 선악과 Free를 설정해야 한다. 근처에 와서 접근도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보기도 좋고 먹음직 스러우며 지혜롭게 할 만한 미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접근을 금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서로 사랑 모드이다. 다스림의 권세를 가진 모든 사람이 각각으로 상대편을 다스리려고 한다. 부부관계도, 사회생활에서도, 심지어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다스림의 본래 의미는 관리하는 것을 잊고 있는 듯하다. 율법의 최종 핵심은 하4이4(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 있다. 이것 위에 새로운 계명으로 주신 것이 “서로 사랑”(요13:34)이다.
끝으로, 새 하늘과 새 땅 모드이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죄의 결과이다. 하지만 주님의 자녀에겐 약속하신 신천신지가 있다. 주님의 구속의 십자가를 믿고 따르는 삶 속에 이것이 현재적 삶에도 주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믿음으로 약속하신 천국을 오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삶 속에 죄가 설 자리는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오늘의 삶 속에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 말씀대로 살기를 결심하고 결단해 본다.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을까? (Is There Hope for Korean Churches?)
한국 기독교가 쇠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몰락했는데 가시화 되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저도 이 진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몰락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소돔과 고모라 의인 10명’을 만드는 것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의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소돔과 고모라 멸망을 예고합니다. 아브라함은 두 도시를 위해 간구합니다. 그 결과, 50명의 의인만 있으면 도시를 멸망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멸망치 않겠다는 양보까지 받아냈지만,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10명의 의인조차 없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몰락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부름의 사명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로 깨어진 세상을 하나님께로 회복시키라는, 주님이 주신 사명을 무시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내렸던 동일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진노를 막는 길은, 소돔과 고모라의 10명의 의인에 해당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는 성경적인 목회를 하고, 성도들은 성경적인 삶을 살고, 교회는 부름의 목적에 충실하는, 성경적인 교회~ 이러한 10명의 의인에 해당하는 교회가 되어보려고 가정교회는 오늘도 숨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 휴스턴서울교회 원로 최영기 목사
얼마 전, 이웃한 교회의 안쓰러운 소식 한 가지를 들었다. 이렇게 교회들이 무너지는가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가진 능력이 없는 우리 부부는 따스한 식사와 한가한 티타임으로 잔잔한 위로를 건네었다.
본인은 위에 글을 남긴 원로 목사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10개 교회에 속하기를 소원한다. 이것을 소원할 수 있는 원동력은 우리 주위에 기도의 영성과 함께 주님의 뜻을 따라 영혼구원하여 제자삼고자 고전분투하는 교회들이 아직 꽤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영혼과 가슴에 품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는 한 소돔과 고모라처럼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란 소원과 간구를 가진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크리스천이라고 한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필자는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 종교인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분류될 것 같아서이다. 사람은 믿는대로 산다고 생각한다. 28년 전 시작한 거듭난 삶 이후, 특별히 전도자의 사명을 따라 목회자로 살아가고 있다.
목회자의 삶 속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을 보니, 나름의 관점과 식견이 생기는 듯하다. 바라기는 나의 고정관념이 되지 않도록 새벽마다 나 자신을 주님 앞에 세우곤 한다. 지난 목회의 여정 속에서 필자에게 정리 되어진 세 부류의 신앙이 있다.
첫째는 If 신앙이다. ‘만약에’ 신앙으로서 하나님께서 만약에 이런저런 일을 행하시면 믿겠습니다. 보답하겠습니다. 행함으로 순종하겠습니다. 창세기의 야곱이 벧엘(루스)에서 자신을 안전하게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준다면,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하는 신앙이다. 교회 안에 초신자들이 이렇게 초보 신앙을 밟고 있다.
둘째는 Because of 신앙이다. ‘ 때문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신앙의 연륜 속에 주님께서 행하신 것에 감사를 알고 기쁨도 누린다고 본다. 기도 응답으로 진급을 하거나 물질적 축복을 받거나 큰 위험이나 위기에서 벗어나 감사로 반응하는 신앙이다. 극히 정상적일 듯하다. 아마도 삭개오가 보인 반응이 그 신앙의 대표적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은혜 주신 것 때문에 지속되고 유지되는 신앙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In Spite of 신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고백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란 믿음에,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겠다는 신앙이 대표적일 듯하다. 필자는 이 ‘불구하고’의 신앙이 역전할 수 있는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 때문에’ 신앙에서 ‘불구하고’ 신앙으로 우리 믿는 신앙인들이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할 때가 지금인 듯하다. 역전을 위하여~
무화과 나무와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우리와 외양간에 가축이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결심과 그리 아니하실찌라도의 다니엘 세 친구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마음에 다시한번 되새겨 본다.
들려지고 이해되는 때 - 고창범 목사
본인은 약 15일 전에 2번째 운전면허 갱신을 위해 VTNZ에 갔었다. 너무도 당황스럽게 시력테스트에서 문제가 생겨서 통과되지 못하였다. 작년에 교체한 안경이 문제인 듯하여 다소 흥분된 상태로 안경점에 컴플레인하여 시력검사를 해 보았다. 그러던 중에 깨닫고 배운 것이 있어서 나누고자 한다.
문제의 핵심은 노안이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은 인생에서 처음 겪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노안이란 것 또한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사실 뒤 돌아보면, 주위에서 많은 사례들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고, 10년 위 인생의 선배들을 통해 보았던 것이 많이 있었다. 신문을 볼 때, 안경을 벗거나 눈을 위로 뒤집어 보거나 하던 모습, 돋보기를 착용하던 모습 등등이다.
더구나 몇 해 전부터 검안사가 말했던 말들이 무슨 말인지가 뒤늦게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미 알고 징조와 대처를 예견하면서 단계적 교정을 제시해 주었었다. 고백하건대, 그 때는 잘 안 들렸다. 특히 몇일 전에 면허갱신을 위한 시력교정을 받았다는 증서를 받으러 가서 설명을 들으니, 아주 구체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본인이 친히 경험해 보고 멘탈이 흔들려 고생하고 보니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한 가지 깊게 깨닫는 것이 있었다. 설교자인 본인이 성도들 앞에서 설교할 때, 교우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지 않다는 것으로 적용해 보았다. 진리의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변함이 없다. 하지만 듣는 우리는 시간과 공간과 환경과 여건의 영향을 받으니, 각자의 정황에 따라 듣고 이해하는 정도가 다를 것이란 것이다.
우리들의 신앙생활 또한 인생처럼 모든 것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일 듯하다.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우리의 영혼도 새로 거듭나서 점점 자라고 성장을 거듭하며 성숙해 질 것이다. 이러한 때, 각각의 시기와 때를 따라 들려지고 이해되는 것이 다를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사실 설교자로써 부담이 조금 덜어지고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도들 각자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영적인 인도와 깨우침이 주어질 것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In His Time~
본인은 고소공포증이 있다. 스카이타워에서 투명 바닥을 걸을 때도 다리에 힘이 빠지는 소심장이다. 100세 시대의 중반을 넘어서니 인생에서 낭떠러지 같은 곳에서 공포증이 생기는 것을 경험한다. 절벽 위에서 가파른 아래를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의 힘이 풀리는 증상이 있다. 하지만 이 절벽은 든든한 로프가 있으면 겁도 나고 공포도 느끼지만 로프를 의지하여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는 50:50의 생존 확률에 의존하여 절벽 아래 물속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만나는 암벽은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내려다 보는 것에서 느끼는 공포가 아닌 올라가면서 내려다 볼 때, 그 위에서 가질 공포가 우리 자신을 위축시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의지할 어떤 로프도 없을 것이니 올라가면서 중간중간에 본인이 직접 안전 로프를 설치해야 할 것이다. 그 로프는 만약에 떨어질 경우 자신을 지켜 줄 생명줄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신중하고 확실하게 고정할 것이리라 생각된다.
사실 본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벽이나 암벽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 속에 그리고 신앙생활 속에,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낭떠러지까지 밀려가서 위협을 받으심(눅4:29)을 볼 때, 우리 또한 직면해야 할 부분이라 여겨진다.
새로운 도약을 결심하고 21년 새 해에, 줄곧 우회하거나 포기했던 암벽을 직면(조우)하고 올라갈 결심을 했었다. 왜냐하면 지난 삶의 여정 속에서 떨어질 것만 같았던 절벽이 고난과 역경으로 나를 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무력감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 버티고 생존하는 훈련도 가져 보았던 것 같다.
1년이 지난 2022년 현재, 여전히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인생도, 신앙생활도 주님께서 주시는 힘(power or energy)이 있어야 하는 고백과 깨달음은 변함이 없다.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렸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널 수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앞에 등장한 암벽을 등지고 도망치거나 뒷걸음쳐 물러서지 않고 직면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자가 되심을 명확하게 확인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상 - 고창범 목사
“상”하면, 떠오른 말이 있다. 관상이란 영화에서 이방원(이정재)가 했던 대사에서, “내가 왕이될 상인가?” 관상가 역할의 송강호는 그 질문 앞에 난처한 표정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다. 그 관상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누가 뭐라고 해도 가장 으뜸이 되는 상은 밥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 없이는 생존이 불가하고 불가한 삶은 인생이라 말할 수 없을 듯 싶어서... 필자는 어린 시절 특히 초등학교(과거: 국민학교)에 받은 상은 개근상이 유일하다. 또 하나 받은 것은 5학년 당시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자연과목에서 실험보고서 잘했다고 상을 받아 보았다.
지난 송구영신예배 때, 2022년 기도제목을 성도 각자가 믿음을 가지고 올려드렸다. 기도제목을 정리하면서 특별히 눈에 들어온 것은 속한 공동체의 자녀들이 한 해를 마치면서 상을 받았으면 하는 소원이 있었다. 해를 마무리하며 결실로서 상으로 인정받고 싶은 듯 싶고, 우수한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싶은 듯 싶다. 우상을 빼고는 어떤 상이든 받으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우리의 일상은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중요할 것이다. 지난 코로나 2년을 경험한 지금은 그 확신이 더욱 견고하다. 코로나 전, 우리는 초고속의 문명화 속에 평범을 지루하게 생각하거나 상대적 패배의식을 가졌던 모습을 회상해 본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평범과 일상이 얼마나 값진 것이고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깊이있게 깨닫게 된다. 일상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밥상을 두고 정다운 대화를 했던 날들이 몹시 그리워진다. 물론 코로나는 일상의 가치를 귀하게 볼 수 있는 계기를 주는 역할도 했을 것이라 긍정적 생각도 해 본다.
속히 이전의 평범한 하루 속에 있던 일상이 상(reward)으로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새벽마다 주님께 기도한다. “주님, 이 코로나를 속히 종식시켜 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더 지속하는 것에 있다면, 이 기간 동안에 주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잘 헤아릴 수 있는 영적인 눈과 귀 그리고 지혜를 주옵소서”
역발상 - 고창범 목사
아랍의 어느 부호(갑부)가 죽을 때가 되어가자 두 아들에게 3:2의 비율로 재산을 나눠주기로 하는데 말을 타고 사막을 횡단하는 경주로 누가 3만큼 갖고 누가 2만큼 갖는지를 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말이 먼저 도착하면 2만큼 갖고 늦게 도착하면 3만큼 갖게 된다고 하였다. 즉, 말이 먼저 도착하면 지는 경주다.
그래서 형제는 서로 자신이 탄 말을 늦게 도착시키려고 애를 쓰는데 서로 눈치를 보며 늦게 가려고 하니까 도무지 진전이 없고, 사막이라 땡볕이 뜨겁게 내리쬐어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어느 현자가 뭐라고 방법을 알려주자 형제는 정반대로 말을 빨리 달리게 하였다. 현자가 알려준 방법은?
해법은? 말을 바꿔서 탄다. 먼저 도착하면 지는 건 '말'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형은 동생의 말을 먼저 도착시켜서 이기면 되고 동생은 형의 말을 먼저 도착시켜서 이기면 된다. 문제가 가진 덫에서 벗어나는 지혜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또 하나의 예로, 2012년 최고의 히트였던 강남스타일도 사실은 역발상을 통해 만들어졌다. 작곡가가 자신의 작곡 스타일을 살짝 비튼 탓에 작곡가도 스스로 불안해 했는데, 그 결과는 초대박 수준을 넘어 세계적인 대스타가 되었다.
인터넷 상에 흔히 회자 되는 문구가 있다. ‘자살' 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고, '역경'을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되고, ’인연' 을 거꾸로 읽으면 '연인'이 되고, ‘내 힘들다' 를 거꾸로 읽으면 '다들 힘내'가 된단다. 더하여 Impossible(불가능한)에 점 하나를 찍으면, I'm possible(난 가능해)라고 할 수 있단다.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마음이라고 믿는다. 마음이 정해지면 생각이 움직이는 것을 필자의 삶에서 줄곧 경험했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자전거를 타고 끊임없이 페달을 밟았다. 지금도 페달링에 분주하다. 그 삶 속에서 역경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역경이 경력이 된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이 경력 위에 오늘 나의 인격과 품성 그리고 능력이 자리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 경력이 만들어낼 다음 스토리를 필자는 오늘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