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에 만난 키위 노숙자 한 명이 있다. 본인보다 다섯 살 정도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새벽기도를 마치고 교회를 나올 때면 자주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 주목되다가 낮시간에도 반복적으로 있길래 하루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주위에 일식집에 가서 맛난 것을 대접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절절하게 이야기한다.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주일 오후 2시경에 교회 식사하니 오라고 했다. 진짜로 왔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성도 중에 관련기관에 있는 지체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생활할 수 있는 터전으로 안내를 해 주었다. 몇 주간은 수염도 깎았고 샤워도 해서 보기 좋았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08/17) 교회에 볼 일이 있어 갔는데, 그 분이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비를 피해서 교회 입구에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옆에 앉아 들어보았더니, 함께 생활하는 터전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 때문에 불편해서 다시 나왔다고 한다. 다리를 떠는 사람, 자꾸 간섭하는 사람 등등(못 알아들음) 때문에 못 살겠다는 말이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노숙자가 혼자서 있을 때 떠들고 이상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에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3일째 되는 오늘 아침에 드는 생각은 현재 우리 주위에 있는 크리스천 중에도 이 형제처럼 신앙의 노숙자들이 있을 수 있겠다 싶어진다. 그도 그런 것이 교회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 중에 많은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진 기준으로 자신을 보고 그 잣대로 타인을 판단하면서 무식하다~ 교만하다~ 부족하다~ 예의가 없다~ 정직하지 않다~ 영성이 없다~ 등등의 이유로 공동체를 벗어나 있다.
그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 가나안 성도가 아닐까 싶다. 어떤 경우에 대화를 하다보면,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제법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노숙자와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볼 줄 알고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다시 나타난 노숙자 형제를 어떻게 품어 주어야 할까? 자신의 틀 안에 갖혀 있는 것만 같은 사람이다. 알콜에 중독이 되어 자신의 의지대로 끊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도와 주려고 하면, 간섭이고 통제로 이해하고 도망친다. 이런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목회 현장에서 신앙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는 크리스천 노숙자로 오버랩 되는 것은 지나친 도약일까? 아니면 현실을 직시한 영성일까? 교회는 종합병원으로 누구나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속한 공동체에서 조화를 이룰 때 전인적인 치유가 가능할 것이라 또한 믿는다.
얼마 전에 오클랜드 목회자들과 관련하여 돕는 사역을 하다가 알게 된 목사님이 있다. 연결이 되어 전화번호를 받고 저장을 해 두고 나니 카톡까지 연결이 되었다. 그 카톡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 받으려고 입장하려고 하는데, 프로필 대문에 이미지와 함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지 않으면 핑계를 찾고 사랑하면 방법을 찾는다.” 그렇거니 하고 소통을 마치고 일상을 가졌었다.
그런데 이 문구가 문뜩문뜩 생각이 나면서 곱씹어 졌다. 그 의미가 점점 더 가슴에 와 새겨지는 것 같더니, 무슨 일을 하고 관계를 가져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과 열정과 정성이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 우리네 모습이 보여졌다. 반면 사랑이나 열정이 없고 하기 싫을 때는 핑계를 찾는 모습이 보여졌다.
올해 초부터 본인은 삶의 자세를 ‘암벽과 절벽’을 비유하며 암벽을 올라 보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래서 평상시 익숙한 것에서 다소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망가진 빨랫대나 트렌들러 바퀴 혹은 부러져서 뚜껑이 망가진 쓰레기통 등등 이런 것들을 고쳐 보려고 노력을 했었다. 이전 같은 접근에서는 나는 할 수 없어 내 분야가 아니자나 말았을 것인데 생각을 바꾸고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방법을 찾아 본 것이다.
그 결과 고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떠 올랐고 가능성들이 보여지는 듯하였다. 그리고 시도해 보니, 해결 되어지는 경험을 했고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다. 최근 이런 경험 속에서 앞에서 말했던 문구가 멋진 명언임을 확신하게 된다.
지난 주에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6번째인 빌라델비아 교회와 관련하여 원고를 탈고하였다. ‘형제의 사랑’이란 뜻의 교회로서 주님께 칭찬받은 모범적인 교회이다. 이 공동체의 중심에서는 사랑이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구했으리라 생각해 본다. 교회의 이름 값을 제대로 한 공동체인 것이다.
사랑은 수다한 허물을 덮는다(잠10:12)고 하였다. ‘사랑하면 방법을 찾는다’는 말이 마음 속에서 유난히 메아리친다. 가족을 사랑하고 목장과 공동체 교우를 사랑하니 내가 무엇을 & 어떻게 해야 할지가 최근 나의 관심사이다. 그 여정에 동행자가 있어 더욱 기쁘다.
요즘은 나름의 노력으로 아내와 대화를 가져본다. 전형적인 남성성을 가진 본인은 필요 이상의 말을 오랫동안 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렇지만 조금 늦었지만 남은 인생을 위한 보험 차원에서 용기를 내고 있다.
휴가를 전후해서 나누었던 주제는 사람들 관계 안에서 긍정성과 부정성이 주는 영향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가지는 존재하고 있으며 필요한 것이라는 중론 속에서, 아내의 깔끔한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맑은 물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면 금방 티가 나지만, 더러운 물에 맑은 물은 쉽게 티가 나질 않는다는 표현이다. 사진이나 그림으로 보여주는 듯한 화법에 미모까지 이뻐 보이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중요한 관계를 멀리하는 순간부터 우주인처럼 살아가게 된다. 멀지 않은 우리들의 주변을 보아도 사람들과 관계가 어려워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이 제법 있다. 잠깐만 생각해도 저 정도면 얼마든지 넉넉한 마음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마음의 문을 닫고 외롭다고 넋두리하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 것 같다. 매사에 부정적인 시각이란 것이다. 사람들과 관계에서 불평하고 비판을 한다. 물론 그 기준은 여러 명분을 가지고 말을 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잣대이다. 특히 그런 사람들 중에서 심각한 사례를 보면, 어떤 단체나 공동체에서 끼치는 영향이 심각해서 모임이 와해되거나 깨지는 경우가 있다. 공동체의 관계를 세우기는 어려운데 무너뜨리기는 쉬운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반면 서로서로 문제 있고 상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 어설픈 긍정의 힘은 큰 변화를 못 일으킨다. 폭탄급 긍정의 힘이 들어서야 그나마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도무지 불가능할 것 같은 불행을 하늘의 은혜로 극복한 사람이 자신에게 흘러넘치는 그 은혜를 강물처럼 흘려 보낼 때나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손길들을 통해서 치유와 회복이 있어지고 사람이 살아나는 역사들이 있게 될 것이다.
나를 비롯한 우리 자신도 여전히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다 더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이웃들이 있다고 아울러 생각한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이웃들에게 우리 선한이웃 공동체가 은혜의 강으로 쓰임받는 역사가 있기를 지난 한 주는 특별히 기도했다.
얼마 전에 유투브에서 의미있는 영상을 한 가지 시청하였다. 제목이 많은 사람이 “죽기 전에 후회하는 4가지”였다.
가장 첫 번째가 한번 사는 인생 열정적으로 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는 것이다. 좀더 할 수 있었던 것인데 게으르고 나태하고 소극적인 자신의 삶을 후회한 것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는 선택과 관련하여 지난 삶 속에서 행복을 선택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니, 당시에 자신이 선택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을 불필요한 욕심이나 교만 혹은 자존심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을 놓치고 불평과 불만 속에서 불행했던 것을 후회한 것이라 이해한다.
세 번째는 사랑과 관련하여 살면서 좀 더 사랑하지 못한 후회가 많았다. 그 때 아내를, 남편을, 자녀를 혹은 부모님을 좀 더 사랑할 걸~ 후회했다. 본인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못함이 평생 후회되는 것을 느끼며 깊이 동감을 한다. 바로 오늘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좀더 사랑을 해 보는 것이 행복의 길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 네 번째는 매사에 감사하지 못하고 산 것을 후회하였다. 누군가 쓴 글을 보니, 그는 말한다. 죽음 앞에 돈은 휴지 조각 같고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행복이 선택이었던 것처럼, 감사도 선택에서 결정되는 것 같다. 돌아본 인생에서 더 개선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아쉬움을 넘어 불평하니 그곳엔 감사가 없었다. 하지만 더 열악한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핸디캡이 아닐까 싶다.
본인에게 지난 12월 31일 밤에 이런 이야기를 두고 나의 아들과 이야기 했던 것이 그 무엇보다 감사였다. 새로운 해에 도약을 꿈꿀 수 있는 열정이 있고 행복을 선택할 믿음의 용기가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가족과 공동체가 있으니 감사 위에 기쁨이 있다.
2021년을 시작하며 결단하고 고백하는 것은 죽기 전에 위의 4가지 후회에 천국가는 길에 목덜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 열정과 행복과 사랑 그리고 감사로 살고자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
모든 일에는 시작할 때가 있고 마칠 때가 있습니다. 시작과 마침은 시간으로 매듭짓습니다. 시간의 마디는 우리 삶에 유익한 점들을 가져다줍니다. 하루, 한 달 그리고 한 해라는 시간의 마디와 매듭은 느슨한 삶에 정신을 차리게 하고 지나온 시간과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동시에 새로운 마음과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인생은 마디와 매듭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잘 매듭지어야 할 것입니다. 즉 마무리를 잘 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마무리'의 국어 사전적 의미는 '일의 끝맺음' 입니다. '뒷마무리' 는 '일의 뒤끝을 맺음' 을 뜻하고 '끝마무리' 는 '일의 뒤끝을 수습하여 맺는 일'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마무리는 일의 결과 혹은 성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일 전체의 결과가 달라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마지막 순간에 방심하고 있다가 마무리를 잘못해서 다 이겨놓은 경기에서 지는 모습을 가끔씩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지부진한 경기였더라도 마지막 끝마무리를 잘해서 승리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끝마무리만 잘하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벌써 2020년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오늘은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고요. 한 해를 잘 마무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얼룩진 부분이 있었다면 깨끗하게 지우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이 지혜로울 듯합니다. 나아가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할까를 늘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전체 인생이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마무리하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을 주님으로부터 듣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