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내년 2024년 5월이 되면, 결혼 30주년 기념일 된다. 우리 부부는 서로 농담하듯이 진심을 이야기하곤 한다. 힘들게 참으로 많이도 살았다고 말이다. 지난 30여 년의 부부로의 삶을 돌아보면, 신비로운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가깝게 살았고 모든 것을 알 것만 같은데, 가장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한 시간이 훨씬 많았지만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크게 싸운 적도 무수히 많았다.
어떻게 표현이 가능할까? ~~~ 한 사람의 인생에서 깨어지고 부서지고 만들어져야 하는 부분을 위해서, 상대 배우자를 가장 사랑하지만 가장 혹독한 칼이나 망치로 각자의 배우자를 만나게 하신 것만 같다. 필자는 비교적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이다. 가까운 주변의 사람들로 인해 관계의 문제가 있을 때는 나름 객관적인 시각으로 돌파해 나가곤 한다. 극단적으로 필요한 경우에는 관계의 단절을 가져서라도 통제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배우자인 아내와는 전혀 그렇지 않다. 특히 가장 가까운 아군이며 후원자인 그녀가 가장 깊숙이 들어온 적군으로 나를 공격할 때는 너무도 치명적인 손상이 주어진다. 30년의 부부생활에서 의견 다툼으로 인하여 공격받을 때, 가장 힘든 것은 그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아내가 나의 치명적인 약점을 정곡으로 찌르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 치명적인 이유는 그 말이 정확한 사실이기 때문에 더더욱 치명적이다.
그 때마다 아내는 말한다. “나니까 이야기해주는 것이라고~” 그렇게 치명적인 약점을 물고 늘어질 때, 나는 너무도 화가 나니 역공격을 가한다. 그렇게 ‘칼로 물 베기’ 같은 부부싸움은 치열해 진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주위에 이런 단계를 극복하지 못한 부부들이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 같다.
우리 부부는 MBTI 검사 자료를 바탕으로 하면 결코 만나지 말아야할 red zone의 사람이 만난 커플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잘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진리와 인생의 선배들의 조언 속에서 지혜를 얻었기 때문이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만, 서로가 존중하며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너무 잘 알고 편안한 나머지 가장 중요하고 잘해야 할 배우자에게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실수요 착오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 부부는 수많은 사랑싸움을 통해서, 획기적인 중재안을 무언 중에 가졌다. 아무리 치열한 싸움도 하루는 넘기지 말자. 너무 다른 상대편을 보고 화를 내지 말고,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천국을 향해 나아가기로 하였다. 바라기는 그 길을 두 손 잡고 발맞추어 함께 나아가기를 소원해 본다.
필자의 형제 카톡방에 큰 누님께서 올려준 내용이 인상적이어서 함께 공유한다.
“우분트(UBUNTU)란 말을 아시나요?” 내가 너를 위하면, 너는 나 때문에 행복하고, 너 때문에 나는 두 배로 행복해 질 수 있다.
아프리카 부족에 대해서 연구 중이던 어느 인류 학자가 한 부족 아이들을 모아 놓고서 게임 하나를 제안했습니다. 나무 옆에다가 아프리카에서는 보기 드문 싱싱하고 달콤한 딸기가 가득 찬 바구니를 놓고, 누구든 먼저 바구니까지 뛰어간 아이에게 과일을 모두 다 주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인류 학자의 예상과는 달리 그 아이들은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손에 손을 잡은 채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과일 바구니에 다다르자 모두 함께 둘러앉아서 입안 가득히 과일을 베어 물고서 키득거리며 재미나게 나누어 먹었습니다.
인류학자는 아이들에게 “누구든지 1등으로 간 사람에게 모든 과일을 다 주려고 했는데, 왜 손을 잡고 같이 달렸느냐?”라고 묻자, 아이들의 입에서는 “UBUNTU(우분트)”라는 단어가 합창하듯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나머지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어떻게 나만 기분 좋을 수가 있는 거죠?” “UBUNTU”는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로서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자주 강조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우분트!’ 어디를 가나 일등 아니면 최고를 따지는 세상이지만, ‘우분트!’ 당신이 있기에 우리 모두가 있다.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모두가 함께 했을 때에 더 커지는 달콤한 행복을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행복하면 당신 주위에 있는 평균 5명이 그날 하루를 함께 행복해한다는 통계도 있답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세상, 저도 오늘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서 이 글을 전합니다. ‘우분트’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위의 글을 보고 오늘을 사는 우리 공동체에게 필요한 합창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선한이웃의 정신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실천에서 찾았다. 개인이나 단체가 이런 정신으로 하나가 된다면, 좀더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분트 정신은 우리 공동체에게 필요한 것이라 생각 되어진다. 놀라운 것은 우리 공동체 안에 강력하진 못하지만 가능성과 실체가 있어서 소망이 있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지고 관계들이 파괴되고 나뉘어지는 세대 속에서 진정 우리들이 찾고 추구할 정신은 한가족과 같은 우분트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2001년 뉴질랜드로 이민을 와서, 올 해로 22년차 이민자이다. 2020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 732만명(외국 국적 시민권: 481만명 & 재외국인: 251만명)이 넘는 한인 디아스포라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 본인을 포함한 우리 가정이 있는 것이다.
당시 5살 & 3살이었던 두 아들은 장성한 성인으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고, 뉴질랜드에 정착하고, 한국에서 교단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이민 교회에서 선교사의 정신으로 이민교회의 목회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그렇게 14년의 목회를 뒤로 하고, 15년차 목회에 진입하면서 선교사와 목사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과 함께 정리가 필요했었다. “나는 선교사인가? 목회자인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생각의 날개를 펴고 자료도 찾아보고 고민도 해 보았다. 그런 시간이 지난 1월부터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의 날개를 접을 수 있는 해답은 가볍게 만난 선배 목사이자 선교사를 통해서 정리가 되었다.
그는 1993년 이민와서 뉴질랜드 교민과 교회의 산 증인으로 손색이 없는 분이다. 당시 소수에 불과했던 한인 목사들 중에서 자신은 환태평양 원주민(이방인) 선교로 부름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30년을 롤러코스터와 같은 원주민 사역을 감당했다. 그 사역의 이야기는 “바에니 쑤숭아(거룩한 희생)”라는 책에서 이미 숙지하고 있었던 터라 은혜가 많이 되었다.
이제 70세가 넘은 그의 고백과 같은 회고가 필자에게 복되었던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CBS ‘새롭게하소서’ 방송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기도 한 그의 사역에서, 오늘 현재형 깨달음이 필자의 생각과 정체성에 해맑은 빛을 더해 주었다.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인교회 목회는 사람을 모아서 성도를 양육(성도를 온전케 함)하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선교사역은 모아서 가르치고 훈련하여 결국엔 흩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과 영적 기류에서 진실함과 순결함 하지만 단호한 영성이 보이는 듯하다. 실제로 당신이 전도해서 양육하고 훈련한 사역자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역 현장으로 보내면서 수많은 기도를 주님께 드렸다고 한다.
현재 우리 목회 현장은 얼마나 사람을 많이 모으고 잘 성장과 성숙을 시켜서 교인수가 몇 명인가로 나름의 합리적인 성적표가 매겨진다.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는 선교사의 정체성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여 새 생명을 경험하도록 하고, 양육의 과정에서 희생과 섬김을 가르치고자 한다. 그 속에서 영적 성장과 성숙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성도들이 가정과 일터 & 사회 곳곳에 파송되는 선교적 목회를 소망 중에 기도한다.
10여일 전에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루돌프의 사슴코처럼, 코끝이 빨개져서 알콜중동자로 오해받을까 염려될 정도로 아프고 괴로웠다. 코끝이 탱탱한 것이 약간의 고통이 생겼고 결국엔 간지러움 증상까지 더해졌다. 무의식 중에도 자주 만지작거리니, 결국엔 열이 터져서 작은 딱정이와 함께 흔적이 생겼다. 루돌프에겐 좋았겠지만, 본인에겐 그렇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왜 이렇게 코끝이 빨개지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생각에 끝에는 내 몸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그렇게 표출된 것이라 결론지었다. 보통은 열이 머리 위로 향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머리로 갈 것이 코끝으로 모아진 것이 아닌가 진단해 본다.
그렇게 시작된 생각쟁이의 생각 여정은 또 다시 시작되었다. 일상의 삶에서,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흔히 이야기할 때, ‘얼굴은 못 속인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마음의 근심이 있거나 오장육부에 무엇인가 문제가 생기면, 사람의 얼굴은 그대로 표시를 내는 것 같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창조를 하셨을까? 필자의 깨달음은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도록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신호를 주어서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코끝에 나타난 적색 신호는 신체리듬이 깨졌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었다. 확신하는 이유는 그 신호 이후에 몇일 동안 몸이 힘들어서 밤잠을 설쳤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다음 생각은 그렇다면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적신호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을 가졌다. 아마도 얼굴에 나타나는 신호를 무시하고 넘어갔을 때, 혹은 나름의 방법으로 그것을 감추었을 때, 속 안에서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든다면, 위궤양이나 심장질환 또는 암이나 뇌출혈 등이 보이지 않지만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필자는 몸에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으면, 밖으로 표출되어 열들이 작은 종기로 나타난다. 언제부터인가 이것을 감사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신호를 따라 문제를 알아 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과 목회 현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아닌가 싶다.
어떤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정답의 반대는 오답이고 해답의 반대는 문제라고 한다. 문제를 알면 해답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여기서 문제를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신체 외부에 나타난 것들은 훌륭한 처세술이나 분장 혹은 화장으로 감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해결방안이 아닐 것이다. 몸은 영혼의 껍데기이기 때문이다. 몸은 마음과 생각에 따라 반응하고 움직인다. 몸의 문제를 보았으면, 일단 크고 길게 숨을 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숨결에 마음을 달래주고 생각을 되짚어 보는 것이다. How?
이번 4월달 추천도서는 탱크목사로 유명한 홍민기 목사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였다. 현실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이 핵심 단어로 읽혀지는 책이다. 만왕의 왕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현실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책에 눈길이 가고 지갑을 열었다. 책 초반에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 예수님은 산 위에서 계속해서 선포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지금은 애통을 원하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지내기를 원한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길 바란다. 힐링을 원한다. 그러나 진정한 치유는 애통할 때 가능하다.
애통이란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다. 나의 연약함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나의 생각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의 갈급함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나의 목마름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의 사람으로 사는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복이 있다고 하신다.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파산 지경에 이르러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 애통함이 우리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신다고 하는가? 위로를 주신다고 하신다.
앞의 내용을 이렇게 정리해 주고 있다. ”자신을 직면하는 것. 자신을 바로 보는 것. 자신의 가난함을 보는 것. 그렇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개척 초기부터 우리 교회는 치유와 영성을 추구하며 건강한 공동체를 일관되게 세우려고 달려왔다. 인간의 지성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로봇으로 수술하고 있는 시대이다. 이전엔 알지도 못하는 병들을 찾아서 더욱 깊이 있는 치료를 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더 많은 병들이 생겨나고 치유해야 할 영역도 늘어만 간다.
그런 고민 속에 탱크목사인 홍민기 목사께서 말하는 진짜 치유는 애통할 때 생긴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바닥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시편기자의 마음이 읽혀지기 때문이다. 이 시대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치유를 맛보고 싶다. 애통함으로 하늘의 위로를 받는 축복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문제와 어려움이 찾아오면 고창범 목사
지금 밖에는 가을비가 산발적으로 내리고 있다. 2일 전 늦은 밤에 동료 목사의 아내가 뇌출혈로 몇 개월 동안 병상 중에 있다가, 너무 이른 나이에 주님께로 부름을 받았다. 이젠 과거가 되었지만, 아내가 이전에 생사를 오고 갈 때 상황이 오버랩 되었다. 그렇게 동료 목사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오늘 날씨처럼 어두침침해 지는 심정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 관계 안에서 문제가 발생해서 어려움을 격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다. 그것이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헤어짐이 있을 수 있고, 불통으로 인한 갈등이나 분쟁이 있을 수도 있다. 왜 우리들의 일상에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에 직면해야 하는 것일까? 몇 일간의 묵상 중 질문이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문제와 어려움을 단 한번도 기대하거나 기다린 적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찾아서 오는 것처럼 다가오는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가능만 하다면, 문제를 만나고 싶지 않다. 결코 지난 인생 속에서 문제를 환영하며 기대한 적은 단연코 한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문제와 어려움은 나를 찾아왔다.
신학 과정 당시 1-2년 동안 두 번의 강의에서 만났던 교수님이 있었다. 실천신학 관련한 강의에서 목사이자 교수였던 그가 강조했던 것이 생각난다. “문제를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고, 문제를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처음엔 무슨 엉뚱한 철학적 발상인가 싶었던 말이었다. 거의 30년이 된 지금도 기억되는 이 문구는 많은 공감 속에 이해가 되어지는 듯하다.
문제 없는 인생은 불가하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손님처럼 우리의 삶의 여정에 수시로 방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분명한 목적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믿음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아니 많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동일한 자세로 살아갈 것이라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반응하며 대처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의 묵상과 생각의 포인트이다
찾아온 문제를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필자의 선택은 어떻게 잘 직면할 것인가 지혜를 가지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문제를 직시하는 과정이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문제 안에 침식되지 않기 위해서, 다소 강직한 마음을 가지고 객관화시키는 작업 혹은 시간을 가져본다. 문제로부터 회피 혹은 핑계를 대는 것 같은 자신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침몰하는 최악의 위험(Risk)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지난 인생의 여정 속에서도 그렇고 14년간의 목회도 그렇고 언제나 문제는 나를 찾아왔다. 이유는 생각 이상으로 간단했다. 생명을 가지고 살아있기 때문이고 성장과 성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재, 필자는 문제와 어려움이 다가오면,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두는 객관화 단계를 가진다. 그리고 그 문제에 침식되어 침몰하지 않기 위해서, 그 문제와 어려움을 컨츄럴하는 자리를 점유하고자 몸부림치듯 싸움을 한다.
그 싸움의 현장은 새벽시간에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은혜로 치루어진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 오후 거리찬양예배를 통해서 나의 연악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강하심을 찬양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문제보다 크신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신다.
목회의 현장에 부르심을 받고 얼마가 지났을 때, 약 5년간은 아내의 암투병으로 고난의 시간을 가졌었다. 지난 후에 이 고난은 유익했었다. 그렇게 고난을 지난 후, 맡기신 양들이 눈에 들어왔다. 허락하신 양떼를 어떻게 목양해야 할까 고민하고 연구하던 중, 존경하는 목사님의 가르침을 따라 가장 우선하여 기도하기를 정하였다.
그 목사님은 하루 3시간 강단기도를 권면하였다. 당신이 그렇게해서 목회 현장을 감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1시간 기도를 점차 늘여나가기를 작심하고 30분을 추가로 몇 개월하고 2019년부터는 2시간 기도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왜 3시간은 못하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법하다. 그 이유는 다음 기회가 되면 나눌 수 있을 듯하다.
2019년 당시를 회상해 본다. 당시 새벽에 기도할 때, 리더십 중에 한 분이 무릎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걱정하듯이 건넨 말이 있었다. ‘그러다가 무릎에 손상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무릎이 아파서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기도하며 주님께 지혜를 구했다. 주신 아이디어는 자전거를 타서 하체도 보강하고 건강도 챙기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현재 경사가 이리저리 많은 오클랜드 북부 지역에서 25-32Km를 일주일에 한번씩 라이딩하고 있다.
그렇게 무릎으로 때로는 잠잠히, 때로는 부르짓음으로, 때로는 무아지경으로(=가수면상태) 기도를 하며 주님의 뜻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2020년 초에 아주 큰 응답체험을 가졌고, 최근인 지난 3월 중에도 무수한 응답들을 경험하였다. 한국 방문을 마치고 다시 복귀한 최근에 기도의 자리 또한 복귀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약 1개월간 쉬었던 무릎기도를 다시하니, 관절에 많은 무리가 오는 것을 느낀다.(한국 방문 중, 대부분의 교회는 장의자 기도) 그래서 강단의 의자에 팔을 기대기도 하고 팔꿈치를 올려서 기도도 해 보았다.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그렇게 20-30분 정도 지나니, 어깨가 아프고 등 위에 짐을 올린 것처럼 힘이 들었다.
그러면서 뇌리에 떠오르는 깨달음이 있었다. 간구하는 기도를 넘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의 자리는 2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 기도의 자리에서 나의 의지로 드려지는 기도에는 어깨의 짐이 지워진 것처럼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 어깨에 드리워진 부담을 덜어내기 위해서 다시 무릎으로 힘을 내려 보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대가 되는가? 너무 당연하게도 다시 무릎이 아파지는 것이다. 나중엔 피가 통하지 않아 걸을 수 조차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면서 감동 가운데 주님의 메시지가 주어진다. “그래 내가 어깨에 지기도 하고 매어 달렸던 그 십자가 앞에서 구한 기도들, 내가 들었단다. 너의 관절이 아프고 피가 통하지 않아 걸을 수 없지? 이제 내가 대신 걸어갈 것이야, 너는 나를 따라서 오렴” 오늘 아침(23년 4월 14일)에 경험한 간증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깔끔하게 짧은 단어로 정리한다. “나는 약할 그 때에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12:10) 내가 약할 때에 강함 되시는 주님이 그 일을 대신 행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온 인생의 여정 속에 마음과 생각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들과 수많은 관계를 가졌어야 했고, 그 관계 속에서 거닐었던 여정이 오늘 말하고 싶은 “길”이다.
지난 주간 의미 있는 알바를 했었다. 2박 3일의 일정을 가지며, 우리 일행은 수많은 길을 차로 달리고 때론 두 발로 걸었다. 그 길들은 큰 대로이기도 하고 고속으로 달리는 도로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도심지의 도로 혹은 좁고 협착한 도로도 있었다. 돌아보면, 우리가 지나온 곳이나 현재 진행형으로 걷고 있는 곳이 모두가 길인 것이다.
다시 한번 뒤돌아 생각해 보니, 지나온 모든 길들이 하나하나 소중했고 의미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고속으로 쌩쌩 달렸을 때는 많은 시간을 절약하고 확 트인 대로 덕분에 가슴까지 시원한 때도 있었다. 반면에 심각한 차량 정체로 인해 약속 시간을 넘어서 안절부절 못하고, 특히나 팔다리가 아프고 속이 터질 것만 같은 때도 있었다.
좀더 생각하면, 양쪽이 드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길에서 넓은 마음을 가져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좁고 협착한 길을 거닐면서 빨리 지나가다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찬찬히 보고 감동을 받을 때도 있었다. 이 모든 여정이 길(Way:방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길에 대한 묵상이 있는 필자에게 올해 초부터 시작한 시편119 강해는 새로운 인사이트를 선물로 받고 있다. 결정적으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라(105절)” 이 구절은 성경 전체의 정곡을 짚어주는 말씀이라 생각한다. 인생에서 거니는 곳이 모두 길들(Ways)이듯이, 119편에서도 수많은 길들이 보여진다. 선한 길과 악한 길이 있고. 명령대로, 말씀대로, 약속대로 또한 보여 준다.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길을 거닐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반드시 선택이란 것을 해야 한다. 뉴질랜드 전역을 가로지는 1번 도로를 가면서 수없이 많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상식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결코 단순할 수 없는 이유는 그 결과가 나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그 누구에게도 전가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하고 때로는 잠을 못 이루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그런 인생의 여정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이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내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사람이 없다”(요14:6) 이 말씀이 깔끔하게 해답을 주는 Good News가 된다고 믿는다.
최근 업그레이드된 구글의 Nevi와 혁신적으로 나타나는 AI 그리고 ChatGPT 이런 것들이 이 길을 대신할 것만 같은 환상에 빠져드는 세대를 보고 있다. 유혹이고 위협은 되겠지만, 결단코 진리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었다.
그 중에 첫 번째는 마음이라고 지난 주에 다루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수많은 관계들로 연결이 되어 있다. 부부,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친척 등등을 통합해서 가족/혈연관계, 교회에서 성도들 안에서 교우관계, 일상의 삶에서 이웃과 관계, 일터에서 비지니스관계 등등 온통 관계이다. 이것을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인 것이다.
최근에 인지한 단어 중에 ‘딩크족’이란 말이 인상적이다. Double Income, No Kids 축약한 신조어로 알고 있다. 부모 세대들이 경제적으로 고생하며 자신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면서, 부부가 함께 벌고 자녀는 낳지 않는 것이다. 결국은 아이들 없이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고 죽으면 행복할 것이란 의미로 이해가 된다. 이런 현상은 인구 감소에 크나큰 기여를 한다. 이런 세대를 보며, 이전에 알지 못한 다른 세대(Another Generation)로 느껴진다.
나아가 얼마 전에 한 뉴스매체에서 젊은 청년의 고립과 은둔하는 삶을 소개하며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였다. 또 다른 자료를 보니, 한국 전체 청년들 중 51만 청년들이 사회적 고립 상태에 있다고 한다. 필자에겐 충격적인 소식이다. 뒤돌아 생각해 보니, 그런 요소들이 가깝게는 우리 가정에서도 일어날 뻔한 적도 있고 주위에 실제적인 사례들도 있는 것을 보게 된다.거의 모두가 알다시피 전 세계적으로 나홀로족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보는 필자는 다음 세대(Next Generation)에 대한 위기감이 코 앞에 온 것을 느낀다.
이런 현상들이 우리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며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염려인 것일까? 동일한 인간관계 안에 있는 교회 공동체 또한 관계로 인해 치유와 회복이 있는가 하면 불행하게도 관계 때문에 상처와 고통 중에 거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일을 만나면 목회자로서 극심한 롤러코스터를 경험하며 심신이 고단하게 된다.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잃어버리는 것만 같은 우리 자신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내 안에 또 다른 나(옛사람)와 화목한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쌍둥이처럼 나와 동일하지만 또 다른 자신과 온전한 조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결단코 따로 살아갈 수 없는 수많은 이웃들과 어떻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최근에 가진 필자의 질문과 묵상이었다.
그 고민의 끝에 주어진 깨달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눅10:27)이다. 수직 관계가 최우선적으로 해결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될 때,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가 순기능을 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지난 주 짧은 글에서 필자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첫 번째가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잠4:23 속에서 말한 것처럼, 생명의 근원이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얼마 전, 목회자들이 모여 자기개발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스터디그룹 모임에 참여했다. “그분이 지으신 마음(Developing Discerning Heart)”이란 제목 아래 10주간 과정이다.
첫 번째 시간으로 서론을 다루었는데, 성경말씀으로 성도를 돕는 접근에서 마음에 대한 주제를 깊이있게 다루었다. 성경 전체에서 540번 이상이나 인간의 마음을 다루었다고 한다. 사무엘서에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heart)을 보느니라”(삼상16:7) 돌아서 생각하니, 이 중요한 마음을 깊이 있게 생각하거나 공부한 적은 많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지난 삶의 여정 속에 고난과 역경이란 시간 속에서 구석에 몰려진 듯한 상황 속에서 가졌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나서였다. 초중고 시절 당시에는 흔히 들었던 말이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다”였었다. 동일한 상황 속에서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해석과 대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마음이란 것을 나그네 같은 인생 길을 걸어보고 나니 깨달아 알 것 같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마음고생을 목회자로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아가서 어떻게 우리 성도들을 도울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목회에 있어 큰 기도 제목이며 숙제인 것만 같다. 유학시절 공부할 때, 비자문제와 생활고를 직면했을 때, 아내의 암투병과 필자의 건강에 적색신호가 왔을 때, 목회의 위기가 왔을 때 모든 시간들을 돌아본다. 목회자의 전형적인 답변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것이다. 물론 동일한 고백이다.
하지만 디테일한 부분에 있어서 그 은혜를 설명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혜의 영을 주셔서 마음을 만져주신 것이다. 위에 말한 목회자 성경공부 모임에서 마음을 다룰 때, 성경 안에서 그 마음에 대하여 4가지 면을 다루었다. 그것은 갈망, 사고, 선택, 감정으로 세분화 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중심의 갈망을 기점으로 지성과 의지와 감정으로 움직여 진다고 이해한다.
타는 듯한 갈망 속에 필자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감안하시고, 적합한 것으로 채우시고 인도하시며 감싸시는 은혜를 알 때, 직면했던 문제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극복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중심(heart)에 있는 갈망 위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경험 그리고 결과를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얼마 전, 한 유튜브 방송에서 여성 호스피스 의사의 인터뷰를 시청했었다. 죽음을 앞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가진 경험담을 이야기하였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죽음을 배울 수 있었다는 부분이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것에 익숙한 필자에겐 약간의 도전이었다. 죽음을 배우라고 한다. 왜냐하면 각자 인생의 진로와 자세가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날 주위를 둘러보니, 주위에 가깝게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아프고 쓰러지고 먼저 주님을 만나러 가는 일들이 빈번이 생겨난다. 그런 중에 주어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50대 중반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각각의 인생이 다양하니, 여러 가지의 생각과 의견이 있을 것이라 여긴다. 55년의 인생에서 오늘 주어진 해안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Heart)이라고 생각한다. 갓난 아이로 태어나서 부모 아래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양육을 받았다. 학창 시절엔 미성숙하니 내 생각이나 힘은 크게 제한적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군생활을 마친 후엔 내 마음이 이끄는대로 살게 된다. 그런데 이 마음이 정한대로 인생이 살아지는 것을 깨달아 알았다. 그 깨달음의 해답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관계(Relationship)라고 생각한다. 존경하여 본받고 싶은 선배 목회자께서 건강한 교회와 목회를 위해 첫 번째로 꼽았던 것이 관계이다. 지난 삶과 현재의 삶을 곱씹어 보아도 역시 온통 관계 속에 있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마음을 지킨 자신이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것이 부부, 가족, 친구, 교우, 직장동료 등등의 관계이다. 이것에 있어서 말씀 안에서 깨달음은 ‘모든 율법과 선지서의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하4이4: 눅10:27)’에서 찾을 수 있다.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 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세 번째는 길(Way)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인생의 여정에서 마음과 생각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관계 속에서 그들과 함께 거닐었던 여정이 곧 길이었다. 그 길은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나 자가용, 또는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탔다. 또 어떤 때는 인생의 고난의 길로 높은 산을 넘거나 깊은 터널을 통과도 하였다. 지나온 길들을 되짚어보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알고 선택한 것이 최고의 선택이다.
태어나고 자라나고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죽음이라는 것, 또한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그 인생의 교훈 속에서 언제 다가올지 알 수 없는 죽음을 배우고 준비하는 것은 지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늘 현실의 삶에서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고, 오늘 현실에 선물로 주신 다양한 관계를 감사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남은 인생의 여정에서 걸어가야 할 길을 조금은 더 신중하고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NZ: 1월 27일)는 오클랜드가 100년 만에 겪는 홍수 피해를 입었다. 당일 시드니에서 오클랜드로 돌아오던 필자는 공항이 폐쇄되는 관계로 현장에 있지는 못했지만 타 도시에 비상착륙하고 3일간 불편하게 지내다가 주일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타 지역인 치치(ChristChurch)에 밤 늦게 도착하고 숙소를 직접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비상사태라 항공사도 수백명을 대처함에 있어 공황상태에 가깝다. 4시간을 서서 기다리다가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확보하고 그 밤에 연락을 했다. 2명의 동료 목사께서 연락을 주었고, 그 중에 한 분의 집에 새벽 1시가 넘어서 들어가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8시 넘어서 일어났다. 그리고 보너스로 여러 사람을 만나 위로를 받으며 감사의 시간을 가졌었다.
타 지역에 있으며 들었던 안타까운 소식 하나는 동료 목사 집이 침수로 절망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Content 보험도 없다. 국가에서 보상은 크게 기대할 수 없다. 오클랜드로 복귀한 후, 다음 날 처음 달려갔다.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도왔다. 비는 여전히 간간이 내린다. 쌓여있는 쓰레기들을 도로 밖으로 옮겨야 한다.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하지만 돕는 손길들이 점점 몰려들면서 10명 넘는 사람들이 돕는다. 시간과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보며 힘이 더해졌다. 피해를 당한 동료 목사에게 특별한 위로가 없던 차에 주님께서 생각나게 하신 말은 “목사님, 사람이 위기에 처할 때, 그 사람의 성적표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돕는 손길들을 보니, 살아온 인생의 성적표가 좋습니다. 이것으로 위로 받으세요” 주어진 생각으로 말한 것인데... 뒤돌아 생각하니, 주님께서 주신 지혜의 말인 것 같다.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의 결과는 시험을 통한 성적표에 드러나듯이, 우리 인생의 성적표 또한 시험이나 환란을 당할 때 그 성적표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목회적 관점에서 보면, 성도의 신앙은 시험을 당할 때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우수(B/A)하던가~ 양가(D/E)집을 오가며 방황하던가~ 신앙의 성적표인 셈이다.
성적표가 좋으려면, 주어진 시험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은 누구든지 알고 있을 것이다. 싫다고 도망가고 무섭다고 뒤로 물러서면, 성적표가 좋을 수가 없다. 인생도 신앙도 삶의 원리는 결코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위기나 어려움이 가까이 있을 때, 자신의 지난 성적표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성적표를 직시하면, 고난 중에도 유익함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시119:71)
곤란한 일이 있을 때, 타지역에서 괜찮은 성적표를 보고 위로받은 것을 감사로 간증하고 싶다. 우리 각자의 성적표는 여러 곳에서 나타날 것이다. 결혼식장에선 하객일 것이고, 장례식장에선 조문객이 아닐까 싶다. 바라기는 우리들이 떠난 장례식장에서 본인이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 성적표가 여실히 드러나고 저 천국에서도 주님께 칭찬받기를 소원해 본다.
약 1개월 전에 3여 년간의 기도가 응답이 되어 귀한 손님을 환영함으로 식사를 대접한 적이 있다. 날씨도 괜찮았고 식당도 깔끔하니 좋았다. 도로에 주차도 바르게 하고 시간도 꼼꼼히 확인하였다. 1시간 무료 주차이니 적절하게 식사를 하고 나왔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한 벌금 용지가 와이퍼에 펄럭이고 있다. 뭐가 문제인가 싶어서 살펴보았다. 주차시간이나 라인 이상 없다. 차가 너무 인도로 들어온 것이 문제인가도 살펴보았다. 특별한 이유가 적혀 있지 않았다. 무엇인가 주차 단속인의 실수가 아닌가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도로 끝자락에서 단속하는 사람이 보인다. 용지를 들고 쫓아가서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무슨 근거로 이 범칙금이 발부된 것인지를...
자신의 자료를 잠시 찾더니, 보여준다. 우프(WOF: 차량안전검사) 시기가 2개월이나 훨씬 지난 것이란다. 연말을 준비한다고 분주했고 차량구입 시기가 12월 말이라 착각도 하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못하고 뒤돌아 왔다. 그날 그 자매의 음식은 16불짜리였지만, 실제 가격은 216불짜리 음식을 대접받은 셈이 된 것이다. 그 자매가 그만큼 소중하고 값진 인생이 되기를 축복함으로 아픈 마음을 위로하며 벌금을 지불하였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 지내는 요즈음에 관련하여 깨닫는 것이 생겼다. 우리의 일상과 신앙생활에서 계획도 잘 잡고 정직하고 올바르게 잘 살며 경건생활을 위해 예배나 봉사나 헌신도 잘하고 있는데, 막상 우프와 같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어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번쩍이듯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교회에서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벌어졌다.
주님을 위해서 전도도 하고, 여러 정황 속에서 목회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칭찬도 받는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상황이면 어찌되는 것인가? 싶은 적용이 된 것이다. 운전 중에 정차 가능한 곳에 차를 세우고 이런 아이디어를 메모해 두었다. 그리고 몇 일을 묵상을 하던 중, 본 글을 적고 있다.
제 아무리 좋고 훌륭하며 철저한 준비 속에서 탁월한 계획을 세울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뜻이 아니면,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통보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WOF 불이행 스티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벌금 폭탄을 받고 난, 오늘 필자의 깨달음이다. 기본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마음속에 다시 각인시켜 본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19:21)
뉴질랜드 안에 오클랜드 한인교회 협의회(오한협)는 세계 수많은 연합단체 중에 몇 안되는 훌륭한 연합공동체 중에 하나이다. 올해가 이민 역사 속에서 오한협이 시작된지 30년째를 맞는다고 한다. 특별히 여러모로 부족한 필자에게 회장직을 맡기신 이번 해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친교 중심으로 뭉쳐진 오한협이 조화로운 연합체로 설 수 있었던 비결은 세 가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먼저는 물이 모든 틈과 간격 사이에 스며드는 것처럼 서로 사랑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서로 섬김이 관계 속에 자리를 잡으면서 접착제 역할을 하였기에 가능했다. 즉, 서로 사랑함과 서로 섬김이 문화처럼 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조화가 콘크리트처럼 든든하게 굳힐 수 있었던 것은 존중함에서 찾을 수 있다. 필자에겐 손꼽는 몇 명의 존경하는 멘토들이 있다.(뉴질랜드 안에서) 개인적인 표현으로 그들을 어른이라고 통명(通名: proper name)하고 싶다. 목댕기 맨이라고 불리우는 분, 바에니 쑤웅아로 유명한 뼈만 남은 찐멋쟁이, 나무때기라고 기꺼이 불리우는 사나이, 어디를 가든 안정적인 사람으로 불리우는 남자, 속을 시원하게 달래주는 찐형,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형님들 등등. 10개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존경하는 어른이 있다.
어떤 이는 정기적으로 만나 격려를 해 주는 이도 있고, 이벤트성을 가지고 만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SNS를 통해서 온라인 상으로 소통하기도 한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존경하는 이들의 존중 속에 돌봄과 격려가 있었기에 오늘의 필자가 있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특별히 ㄹ몇 년전부터 회장직을 감당하라고 권유해 주셨던 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명예욕에 노출된 나 자신의 마음이 확인이 되어, 회장의 기회에서 기도하며 물러섰었다. 더 시간이 지나고 멘토 되시는 분의 재권유와 도전 속에서, 명예보다는 섬김의 마음으로 설 결심으로 현재 대표직을 감당하게 되었다.
오한협에서 임원진으로 섬기면서, 크게 배운 인격의 자세 중에 하나가 존중함이다. 이 존중이 서로에게 적용이 될 때, 견고한 관계가 구축되는 것을 보았다. 그 구축 위에 연합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023년부터 회장 임기는 종전 2년에서 1년으로 줄여졌다. 주어진 한 해 동안, 받은 사랑과 섬김을 존중이란 그릇에 담아 선배와 동료 그리고 후배들 모두와 함께 공유하기를 소원한다.
지난 2주간 동안 틈틈이 읽고 있는 “한국교회 트렌드2023”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목회데이터연구소’와 ‘희망친구 기아대책’과 같은 실제적인 현장에서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분석한 것이라 신뢰가 더하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 우리 교회는 어떻게 준비해야할까? 고민하던 중, 책 중간에 아래와 같은 정리된 글이 눈과 생각에 들어왔다.
온라인 교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2000년대 초부터 몇몇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사이버 교회'(cyber church), '디지털 교회'(digital church) 등의 논의가 있었다. 코로나19는 그 논의를 오늘의 당면한 과제로 앞당겼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 예배당의 문이 닫혔을때, 이에 대한 교계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한쪽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현장 예배를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국가방역과 성도들의 안전을 위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 많은 교회들은 여전히 현장예배와 온라인 예배를 병행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에도 온라인 예배를 드리겠다는 교인들의 참여 의향은 점점 더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다음세대는 더 이상 현장 예배와 온라인 예배를 대립이나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다.
온라인이 '필요' (needs) 기반의 공간이라면, 오프라인은 '열망' (wants) 기반의 공간이다.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재미와 효율'을, 오프라인에서는 '의미와 경험'을 추구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회는 다가올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하이브리드 처치 (hybrid church)로 변화하여야 한다. 하이브리드 처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장소를 기본으로 삼지 않는 교회를 의미한다. 하이브리드 처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곳에 장소의 우선성을 두지 않는다. 하이브리드 처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영역 모두를 매우 진정성 있게 돌보고, 동일한 관심으로 살핀다.
하이브리드 처치는 일시적인 트렌드로 사라져버릴 교회 모델이 아니다. 가상과 현실의결합이 더욱 가속화되고, 교인들의 삶의 영역 또한 폭발적으로 확장됨에 따라 교회는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하이브리드 처치로 변화해야 한다.하이브리드 처치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사역 모델을 개발하고, 유기적인'옴니채널'(omnichannel)을 통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5G, AI, 메타버스 시대를 논하는 세대를 우리는 살고 있고, 과거 인터넷 혁명과 스마트폰 시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다가올 세대 또한 직면해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화를 가질 것인가? 적극적인 자세로 하이브리드 처치를 구축해서 뒤따라가기 보다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지혜로운 대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난 주간 호주의 시드니 구세군라이드교회 김환기 사관의 칼럼을 읽었다. 짧고 간결한 문체는 매달 관심있게 보는 글 중에 하나이다. 10월달 크리스천리뷰에서 “말씀으로 기도하고, 기도로 호흡하면, 말씀이 역사한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다.
간략히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랑할 것이 많았던 바울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는 세 가지를 자랑했다.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였고(고후11:30),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고(갈6:14),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자랑하였다.(살전2:19)
말씀으로 기도하고: 성경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약(約)’이라는 말은 ‘묶다’, ‘약속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말씀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약속을 의지하여 기도한다는 뜻이다. 즉, 말씀에서 생명을 길어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로 말씀을 읽고,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기도로 호흡하면: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변화되어 하나님 편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기도는 하나님께 주권을 돌려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다. 호흡이란 내보냄(호,呼)과 들이마심(흡,吸)으로 이뤄진다. 우리말로 날숨과 들숨이다. 날숨은 말하는 기도이고 들숨은 듣는 기도이다. 우리의 간구를 날숨으로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숨으로 듣는 것이다.
말씀이 역사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役事)하느니라”(살전2:13)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로고스’가 믿는 자 속에서 ‘레마(각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가 되어 역사하게 된다. ‘역사한다’란 ‘일(work)한다’는 뜻이다.
김 사관의 짧은 글을 읽으며 오늘 우리들의 기도를 다시한번 되짚어보게 되었다. 아주 많은 경우가 필요에 의한 기도와 간구일 듯싶다. 그래서 당장 눈앞에 시급하게 필요한 것을 집중하여 구하느라, 약속의 보증서인 말씀(성경)을 뒤로 할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로고스, 즉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능력의 근원이신데 이 진리를 간과할 때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말씀에 근거한 기도는 들숨과 날숨처럼 자신의 간구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할 때,, 말씀이 친히 역사하셔서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이루시는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