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000년 3월에 남편과 함께 뉴질랜드에 오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개척자적인 면이 많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해서 영어권 나라에서 공부를 해서 청소년과 청년에게 더 도움이 되는 목회를 하기위해 처음에는 단기선교로 몇 번 갔었던 필리핀에 가서 1년 있다가 비자가 원활하게 나오지 않아 뉴질랜드로 오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영주권을 그해 11월에 받게 되어서 공부를 시작하게되었습니다. 어렵게 공부를 마치고 돌아갈려고 했으나 한국의 여건과 무엇보다 저희 집을 바로 위에 아주머니에게 관리를 부탁했는데 원래 월세로 받던 것을 전세로 바꾸고 2층 건물을 3층으로 늘려서 전세로 몫돈으로 쓰시고 그집은 은행융자와 전세자금으로 인해 빛좋은 개살구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로인해 저희 가족은 한국에 들어가서 살 곳이 없어서 2007년 진짜 이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남편은 풀타임 사역자로 일하게 되었지만 저는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고 주일도 쉴 수 있는 유아교육 대학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유아교육이라는 것이 다른 공부와 달라서 일상영어를 잘 해야하고 동요나 아주 사소한 스토리등도 습득해서 외어야했기에 저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쯤에 남편이 교회 개척을 하게 되어서 저는 시간에 쫓기며 살아갔고 어사이먼트를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여러날 밤을 샐 수 밖에 없었습니다. 풀타임 학생으로 유치원에서 일하고 엄마로 아내로 개척교회 사모로서 매일매일이 전쟁같이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제가 느끼는 피로감은 내 온몸을 짓누르고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면 손으로 다리를 억지로 들어서 옮겨야만 일어날 수 잇게 되었습니다. 2011년 11월 어사이먼트가 막바지에 이를 때 하루에 두 번씩 샤워를 해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데 어느날 몸에 만져지는 것이 있었고 병원에 가서
나의 아침은 작은 속삭임으로 시작된다. “하나님 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이 주신 최고의 하루를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리고 나서는 거울 앞에 서서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내 몸의 구석구석을 만지며 “머리카락아 눈썹아 사랑한다 고맙다 감사하다”라고 일일이 말로 표현해 준다. 이것이 눈 뜨자마자 하는 것 중의 하나이며 나는 블레싱 샤워라고 부른다. 내 몸의 핏줄, 근육과 피부, 모든 세포세포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알기에 내 몸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이다. 예수생명의 보혈이 나를 덮고 있다는 것이 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살아오면서 내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18절 말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내게 무척이나 부담스런 말씀이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말씀으로 듣고 입으로 암송했던 말씀. 그러나 네게는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가가 의문스러웠다. 그것은 사도 바울선생이 가능한 것이며 이론 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각기 다른 세가지 암과의 만남을 통해 성경말씀이 진짜구나.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 안에 내가 거할 때 주님이 내 안에 거할 때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는구나. 상황이나 여건이 아니라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병원에 가면 내 병력만 보고도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나를 참 측은하게 여긴다는 느낌을 그들의 태도나 눈빛에서 느낀다. 2011년 11월 처음 유방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그 후로 두 번의 다른 암 판정을 받고 2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3번의 수술, 2번의 항암과 방사선 등 계속되는 치료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그것은 아주 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았지만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와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7살 때 처음 동네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게 된 어언 40년이 넘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지금, 육신적으로 가장 연약해진 이 시점에 내 인생의 최고의 기쁨과 감사를 누리고 있다. 이것이 예수 믿는 복음의 비밀인가 보다.
어렸을 때 처음 가 본 교회가 재미있었고 설교나 공과공부를 통해 알게 된 예수님이 참 좋았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나는 꿋꿋하게 혼자 주일날 교회에 갔다. 우리 집은 일요일은 온 가족이 늦잠을 자고 느지막하게 아침을 먹기에 거의 매주 굶고 교회에 갔지만 정말로 예배 드리는 것이 신났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신앙생활은 중학교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했고 예수님을 위해 살고 싶었고 어린 생각에 목사가 되는 것이 주님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고 3 때 신학대학교 가는 것이 부담이 되어 목사님과 상담 끝에 일반대학에 가서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위해 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일반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학창시절 새해가 되면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생활계획표도 짜곤 했는데 고 2학년인가 3학년 때쯤 일기장인가 큰 노트 제일 앞장에 내 인생의 기도 제목을 아주 큼지막한 글씨로 썼었다. 그 첫번쨰와 두번째는 원하는 대학과 학과 그리고 취업에 대한 것이었고 세번째는 33세이후에는 주님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것이었다. 네번째는 내인생의 말년에는 책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돌리고 싶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기도 하지만 그때는 나름 고등학교 졸업 후 내 인생과 서른세살 이후는 33년을 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닮은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살다가 노년에는 주님이 함께 하셨던 내 인생을 책으로 정리하며 주님 앞으로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때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좋고 행복한 것만 있는 줄로 생각했다.
그 후 기도제목에 있는 학교는 아니지만 그와 관련된 학과에 가서 기도의 내용처럼 원하던 직종에서 정말 재미있고 신나게 직장생활을 했고 결혼 후 남편의 비전이 청소년과 청년에게 있었기에 새로운 세대를 품기 위해 지경을 넓혀 경험도 쌓고 영어도 배우기 위해 외국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때 나의 나이가 만 33세이다. 멋도 모르고 기도했던 소녀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그 후부터 나는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전까지 주님께서는 내 기도에 항상 풍성하게 응답하시는 아버지셨는데 그 후로의 삶은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상황들만 일어났다. 2000년도 필리핀에 가게 되었고 나는 그곳에 머무는 내내 오지로 나갔다 오시는 선교사님들과 단기 선교팀의 밥 해주는 일을 했다. 기쁨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내가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집 옆집에 남편의 사촌형님이 사셨는데 필리핀 오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었고 사모님이 사정 상 한국에 가 있는 적이 많아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오지에서 돌아 온 선교팀들은 한국음식을 대하면 평소의 배 이상을 드셔서 어쩔 땐 밥이 떨어져 나는 굶을 때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김치를 한번도 담아본 적도 없고 집들이도 식당에서 주문해 집에 있는 그릇에 담기만 했던 직장 생활만 하다 간 나로서는 밥하는 것이 난감할 따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할 줄 아는 게 너무 없어 주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그래서 제일 먼저 밥하기부터 훈련시키기 시작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주님의 훈련을 나는 깨닫는 듯하다가 잊어버리고를 반복하는 일상이었다. 2011년 11월 유방암판정을 받기 전까지 나는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유아교육을 풀타임으로 공부하고 있었고 15시간은 의무적으로 유치원이나 child care centre에서 일을 해야했다. 40이 넘은 나이에 전공과 무관한 공부는 남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과제 내는 날이 거의 월요일이라 주일 날은 거의 밤을 세운 적도 많았다. 교회의 사모로 두 아이의 엄마로 아내로 나는 내 삶의 무거운 짐에 눌려 있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주님과 함께 예수그리스도를 푯대 삼아 가는 줄 알았는데 바쁜 일상의 파도 피하기에 급급해 하나의 파도를 피하고 또 다른 파도를 피하다 보니 내가 바라보던 푯대와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 몸은 항상 피곤했고 모든 것이 내가 하기에 벅 찰 정도로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지 못한 채 삶을 살아낸 것이었다. 주님을 내 삶의 주인이라 부르기만 할 뿐 마치 호적 상의 호주로만 올려놓듯이 하고 내 힘과 능력으로 살았기에 그렇게도 삶이 힘들었다. 어쩔 때는 80프로 어쩔 땐 50프로 주님께 선심 쓰듯 믿어드렸던 나의 모습. 나의 주님은 100프로 믿음의 주요 온전하신 분인데 나는 주님을 그렇게 대하며 살지 못했다. 우리 주님은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상처투성이고 일어날 힘이 없을 때에도 끝까지 기다리시고 절대로 손 놓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치유의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어떠한 실패, 좌절 과 고통 속에서 절망이 끝이 될 수 없다. 알파가 오메가 되신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기억을 돌려 2011년 첫 번째 암 진단 받은 후 나의 생각과 묵상들을 기록한 일기를 다시 보니 주님과 함께 했던 추억의 여행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그 여정의 키워드는 사랑이었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셨고 다시 살아나시어 부활과 승리를 보여 주시며 항상 함께하신다는 증표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그 사랑. 눈동자처럼 나를 바라보고 지키시는 그분의 사랑에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가슴 먹먹히 전해오는 그 사랑이야기. 아이가 너무 아파 고통스러워 할 때 엄마가 아이 대신 본인이 그 고통을 대신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되기를 구하는 눈물의 기도를 하듯이. 자식의 죽음 앞에 본인이 대신 죽일 수 있다면 정녕 그렇게 되길 소원하는 부모의 애통함처럼. 그 애끓는 부모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죄 때문에 죽어가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예수그리스도 독생자를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절절하게 전해져 왔다.
2011 년 12월 20일 첫 번째 유방암 항암이 시작되었다. 나의 경우 초기로 판정되었지만 암의 성향이 가장 공격적이고 재발 가능성이 높다고 분류되는 3단계였기에 말기 암 환자와 같은 가장 강도가 센 항암을 받게 되었다. 3주에 한번씩 4번과 일주일에 한번씩 12번 거의 6개월에 걸친 치료였다. 본의 아니게 암과 가까이하다 보니 간혹 내게 암에 대해서 물어보시거나 새롭데 진단받아 힘들어 하시는 분들 중에 항암에 대해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럴 때면 수술과 방사선 치료만으로 끝나는 분들에게는 위로와 격려로 대화할 수 있지만 항암은 어떻게 설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하게 된다.
항암제는 암세포도 죽이지만 건강한 세포도 죽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부작용을 동반한다. 항암제가 투여 되기 전 여러 종류의 항암 부작용 방지 약을 미리 먹고 일주일정도 더 복용한다. 항암제가 얼마나 센지 약이 몸에 투여되고 나면 정말 통제할 수 없는 여러 상황이 발생한다.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입맛도 변하고 식욕감퇴, 구토, 근육통, 탈모, 손발 저림 등등 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탈모는 유방암 항암의 대표적인 예이고 시간이 갈수록 머리카락뿐 아니라 몸에 모든 털들이 빠지기 시작한다.
사람은 참 어리석어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은 후에야 그것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그런 전형적인 케이스가 바로 나다. 첫번째 항암 후에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미리 가발도 사고 머리에 쓸 두건도 준비하라고 간호사가 말해주었고 감사하게도 가발은 정부에서 지원된다. 항암 후 2주정도 된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욕실에도 소파에도 베개에도 빠져도 빠져도 머리카락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경험자 분들의 조언대로 그 즉시로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밀어 버렸다. 사실 숱도 없는 편이고 흰머리도 많아 언제나 불만이 많았던 터라 한번도 진심으로 감사한 적이 없었던 나의 머리카락. 이제 이별한다고 생각하니 그 동안 몰라 봐주어서 미안하다고 얼마나 고생했냐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며 다른 몸의 털들도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눈썹이 거의 다 빠진 후에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아 주님이 다 필요하기에 만드셨구나 라고 깨달아졌다. 속눈썹이 없으니 샤워할 때마다 물이 눈으로 바로 들어 와 불편하고 눈가에 먼지도 많이 들어와 눈곱도 많이 꼈다. 내 몸의 어떤 것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다는 사실과 그 몸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부족하게 느껴졌던 모든 것에도 감사하게 되었다. 그 동안 잊고 지내온 감사. 병을 통해 진정한 감사의 계절이 되돌아 왔다.
나는 아마 이 오클랜드 땅에서 가장 사랑의 빚을 많이 진 사랑이 아닌가 싶다. 아프면서 많은 분들의 중보와 사랑, 넘치는 섬김으로 그 긴 치료기간이 하나님의 은혜 손길 안에 있었다. 이 지면을 통해 그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그 중보가 나를 살렸음을 누구보다고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에 어떠한 성황 속에서도 소망의 꽃은 피어 오른다.
3번쨰 항암을 하고 나서 나는 고열에 시달렸다. 항암 중 38도이상이 되면 병원에 반드시 연락 해야 하는 것이 환자의 의무 사항일 정도로 고열은 위험해서 24시간 전화할 수 있는 응급라인도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낮에 담당 항암의사에게 전화한 후 본인이 전화를 받을 수 없으므로 콜센타로 전화하라는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그 전에도 한번 열이 난 경험 상 입원해서 계속 항생제 맞고 피검사하고 응급실 의사 바뀔 때마다 나의 병력과 입원까지의 과정을 거듭 설명하는 것이 번거롭게만 여겨졌다. 낮에는 파나돌을 먹으니 열이 떨어졌고 저녁을 먹은 후 몸에 한기가 와서 일찍 9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숨이 너무 차고 가슴이 답답해 잠에서 깼다. 침대에서 일어 났는데 온 몸은 땀이 난 것 같고 뜨거워 체온계를 재니 39도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이상 했다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12시 30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침실에서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아 “주님 숨을 쉴 수 없어요 저 좀 살려 주세요” 라며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가 끝남과 거의 동시에 어디선가 모발폰이 울렸다. 거실 구석에 있던 내 핸드백에서 울려지는 소리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주님이 날 살리려나 보다 라는 생각으로 전화를 받으니 담당 항암 의사다. 좀 괜찮아졌냐고 열은 내렸냐고 물었다. 아마 내가 녹음한 메시지를 확인하고 그 한밤중에 전화를 한 것 같았다. 내 상태를 말했더니 의사는 거의 패닉 상태로 너 그대로 있으면 죽는다고 남편 바뀌라고 하면서 빨리 오클랜드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죽을 수 있다라는 말을 네 다섯 번이나 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여러 명의 간호사들이 나를 에워쌌고 이미 병실도 큰방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응급실 의사가 나에게 말했다. 죽을 수도 있다고 항암 중에 38도 이상 고열이 계속되면 면역이 급격히 떨어져 갑자기 죽을 위험성이 높다고. 고열 때문에 나의 혈관은 수축되어 여러 명이 여러 군데를 찔러 보고 천신만고 끝에 겨우 피를 뽑고 주사를 맞았다. 얼마를 잤는지 눈을 떴을 때는 암 병동으로 옮겨져 항생제를 맞으며 계속 체온 체크와 피검사를 했다. 어떠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면역력이 급속도로 떨어져서 고열이 난 것 같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담당 항암 의사가 날 보러 왔길래 나 아직 살아 있다고 하니 죽는다고 너무 겁주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열이 나면 언제라도 바로 연락하라고 신신당부 했다. 2박 3일만에 퇴원했고 나중에 진료 받을 때 그 의사에게 물었다. 왜 그때 나에게 전화했냐고? 새벽 1시 가까운 시간에 의사가 환자에게 전화한다는 것은 좀처럼 드문 일이기에. 의사의 대답은 침대에 들어가 자려고 하는데 내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도를 끝낸 바로 그 절박한 시간에 주님은 그 의사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내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셨다.
시편의 17편 8절 말씀처럼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두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시편 23편 다윗의 고백이 바로 나의 고백이 되게 하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는 이제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노래한다. 주님이 바로 나의 소망이시기 때문에.
항암은 정말 받으면 받을수록 힘들고 절망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약의 위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여서 나를 삼켜버리는 듯 했다. 그 주사약은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 없이 몸 속으로 살며시 들어오지만 점점 내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들을 발생시키고 나중에는 그 약의 스케줄대로 움직여 갔다. 3주에 한번 맞는 항암제의 경우 첫 주는 굉장히 힘들고 둘째 주는 좀 나아지고 마지막 주는 많이 회복되어 피검사를 하고 그 결과가 괜찮으면 또 항암을 받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그 약을 만든 목적과 스케줄대로 사람의 몸이 반응하는 것이었고 그 약을 만든 사람의 의도대로 내 몸은 따라 가는 것이었다. 마치 육체의 소욕대로 살면 죄가 뿌리를 내리며 살고 성령의 소욕대로 살면 성령의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나는 무엇에 붙들려 사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약에 취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기를 주의 영이 가득하여 내가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찬양하며 춤추며. 내 모든 혈관 안으로 주님의 보혈이 흐르기를 기도했다.
항암을 받으면 받을수록 부작용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심해졌다. 후반기로 가면서 손톱과 발톱의 색깔도 누렇게 변하고 손끝과 발끝이 자려오는 것이 심해져 병마개를 열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손가락이 둔해져 글씨를 쓰는 것도 힘들어지고 글씨체는 엉망으로 변해갔다. 몸이 전체적으로 부어가고 그 중에 얼굴은 더욱 두드러지게 달덩이 같이 변해있었다. 가끔 욕실 거울에 비쳐지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내 스스로도 소스라치게 놀랄 때도 있었다. 머리는 빡빡이고 눈썹도 없는 푸석푸석해 보이는 얼굴이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다. 3주에 한번씩 하는 항암을 4차 받을 때는 약 부작용이 너무 심해 항암제의 양을 줄여서 맞았다. 그리고 나서 시작한 일주일 한번씩 하는 항암은 3주 사이클보다 훨씬 수월했다. 구토증세는 별로 없었지만 오랜 기간의 항암으로 내 몸은 점점 약해져 갔다. 코와 목에서 피가 섞여 나오기도 하고 손과 발의 저림은 점점 심해져 갔다.
특히 항암 받고 온 첫 주는 음식을 해 먹기가 어려울 정도로 몸이 힘들었다. 그리고 입맛이 변해 간을 맞출 수가 없어 힘겹게 만들긴 해도 맛이 없어 가족들이 먹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마다 언제가 항암 받는 날인지를 기억하시고 꼭 항암 첫 주에 나와 가족들을 위해 반찬과 김치 등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해 주셨던 권사님이 계셨다. 교회 중보기도 모임에서 나에 대해 기도를 했는데 본인 마음에 계속 부담이 되신다고. 자신도 유방암 수술과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보면 긍휼한 마음이 드신다고 했다. 항암 할 때는 입덧하는 것처럼 구토증세도 있고 문득문득 먹고 싶어지는 것이 생각 날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인가 엄마가 해준 생선조림이 먹고 싶은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날 정말 엄마 손 맛나는 생선조림을 누군가 해다 주실 때도 있었고 어느 날은 산책을 하다 오늘은 전복 죽을 먹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며 집에 갔더니 어떤 집사님이 먹고 싶었던 전복 죽을 갖다 놓고 가셨다. 아이가 아파 누워 있으면 엄마가 세심하게 아이를 돌보며 먹는 것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듯이 주님께서는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셨다.
한번은 밥맛도 없고 먹을 반찬도 거의 없어 보통 때는 저녁6시쯤 밥을 먹는데 반찬 투정하는 아이처럼 7시까지 저녁을 안 고 속으로 아버지 반찬 좀 주세요 그래야 힘이 나지요. 그 기도가 끝나자마자 누가 들은 것처럼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 전이면 하지 말고 잠시만 기다리라고. 15분 정도 지나자 색 색깔의 나물과 전등 정말 진수성찬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어느 날은 하나님 김치가 떨어졌어요. 어떡해요 라고 읊조렸더니 그 날 오후 평소 알고 지내긴 하지만 한번도 왕래가 없었던 어느 집사님께서 맛있게 익은 김치 한 통과 함께 우리 집에 방문하셨다. 집에서 김치를 보는데 갑자기 마음이 두근두근하고 빨리 나한테 김치를 갖다 주어야겠다는 부담감이 생겨 급하게 왔노라고.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분들께서 주님의 천사로 나를 방문해 주셨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언제나 그 대상이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분들 어쩔 때는 내가 전혀 모르는 분들도 계셔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인사조차 할 수 없었던 분들도 계셨다. 지면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이러한 일을 통해 주님은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단다. 혜영아, 내가 너를 눈동자처럼 지켜 보고 있단다. 내가 하는 것이란다 라고 꼭 집어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허락하셨던 것처럼 수술과 항암 치료기간에 특히 집중적으로 내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정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때 주님이 그것을 알고 공급하신다는 사실이 내게 너무나 감사했다. 미리 아시고 세밀하게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흠뻑 취해 있었기에 그 힘든 광야 같은 시간을 감사하며 보낼 수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항암은 결국 마지막 12번째는 받지 못하고 끝냈고 몇 주의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다. 정말 몸도 마음도 자유로워지는 기분도 잠깐 방사선 치료에 들어갔다. 방사선치료는 항암에 비하면 누워서 떡먹기 같이 쉬웠고 주중에 매일, 35번의 치료를 받았다. 가서 실제로 방사선을 쬐는 시간은 몇 분에 불과하지만 가운 갈아입고 간호사들이 자세를 잡아주면 그 자세 그대로 몇 분 간 방사선을 쬐어야 했다. 치료가 시작 되기 전 간호사들도 나가고 문이 닫히고 그 치료실에는 나 혼자만 있었다. 기계 때문인지 그 방의 온도가 좀 낮아 항상 쌀쌀한 공기와 윙 하고 돌아가는 기계 소리와 적색의 광선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누구도 방사선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오지 않는 그곳에 오롯하게 혼자 누워있는 그 때 나는 주님을 불렀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진정한 치유의 광선이시기에 병 나음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치료를 받았다. 방사선 치료는 항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중에는 살이 벌겋게 익어가고 햇볕에 탄 것처럼 갈라지고 간지럽고 허물이 벗겨졌다. 그리고 피곤함이 심해질 거라고 하더니 날로 내 몸은 더 피곤해 갔지만 이제 곧 치료가 끝난다는 생각에 즐겁게 그 시간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거의 10개월에 걸친 기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사랑은 파이프처럼 연결된 많은 주의 사람들을 통해 흘러가는 것이기에 나도 그 사랑을 흘러 보낸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성령님의 부드러운 음성에 민감한 그분들처럼 나도 더욱 주님께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손으로 발로 심장으로 살아야겠다.
10개월간의 나의 일상은 모두 병원과 관련 된 일들의 연속이었다. 평소에는 환자라는 것을 잊고 지내다 병원 문턱에 서면 ‘나는 환자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 나는 죄인이지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필요하지’라는 생각이 같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더라도 정밀 검사를 하면 몸의 자세한 상태가 진단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완벽하게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형편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죄인을 구하시려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달려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런 죽음을 당하셨다. 주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그 말씀이 너무도 선명하게 내 마음 안에 새겨졌다.
수술, 항암과 방사선 거의 10개월에 걸친 치료가 끝이 나고 나니 날아갈 것 같이 마음과는 달리 몸은 굉장히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방사선 치료 후에는 치료 도중보다 더 많은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마지막 치료 후, 방사선과 스태프들의 사랑이 담긴 축하카드를 받고 이렇게 내 삶의 터널을 또 하나 통과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3개월에 한번씩 항암 의사와 수술의를 만나 내 상태를 점검했지만 그것이 내진하고 나의 상태를 들어주는 것뿐이라 어쩔 때는 전문의들을 만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전문의들에게 한국에서는 몸 한군데 암이 발생하면 다른 곳도 전체적으로 체크하는 것이 일반적이니 CT 스캔 같은 것으로 정밀 검사를 요구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유방, 갑상선과 자궁은 다 연결 되어 있으므로 꼭 연결해 체크 받고 싶다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러나 몸의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증상에 대해서도 의사들의 반응은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너무 오래 받아 몸이 약해진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만 했다. GP, 방사선, 항암과 수술 의사를 번갈아 만나는 동안 거듭 이야기를 했지만 나의 경우는 절대로 다른 암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다른 부분의 검사를 허락해 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특히 CT 스캔은 방사선 노출이 심해 몸에 안 좋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본인이 이상하다고 판단되면 검사를 받을 수 있지만 뉴질랜드에서는 의료보험이 있건 없건 예방차원의 어떠한 검사는 받을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치료가 끝난 후 마음으로는 벌써 한국에 가 있었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갈 수가 없었다. 11월에 교단 차원에서 교회 창립예배가 있어서 한국에서 노회 목사님들과 사모님들 11분이 오시기 때문에 1월 달로 미루기로 했다. 마침 2013년 1월에 총회에서 주관하는 2주간의 선교훈련이 있어 남편과 함께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몸이 다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꼭 그 훈련을 받아 주님 앞에서 새로운 인생의 2막을 열고 싶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온전하게 주인 된 삶이 나의 소망이기 때문에,
2013년 1월 한국은 무지 추웠지만 내가 태어난 땅이기에 엄마 품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설레는 마음으로 선교훈련에 동참했고 이미 선교지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았다. 세계 각국 이집트, 베트남, 중국, 네팔, 우루무치 등등 다양한 지역 여러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내게 감동으로 전해졌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진행되는 훈련은 단기 집중 코스이기에 만만치 않았다. 다 회복되지 않아 퉁퉁 붓는 손과 발, 근육통, 머리에는 항상 모자를 쓰니까 누가 봐도 환자처럼 보였을 텐데. 씩씩하게 그 훈련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도 다 성령님의 도움과 보살피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중의 30대 중반의 선교사님 한 분이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본인 이야기를 나누셨다. 아내가 유방암에 걸렸는데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가 없어 몇 개월 병상에 있다가 천국에 갔다고 하셨다. 나보고 꼭 건강해지시라고 당부하는 눈빛이 너무 쓸쓸해 보였던 선교사님. 죽음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데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가까운 사람의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을 통해 그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 죽음 뒤의 세상. 그것을 믿기에 세상에 보여지는 가치와 문화가 아니라 천국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하기에 젊은 나이에 청천병력 같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도 다시 복음 들고 일어 설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분들이 그러하듯이 건강검진은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꼬박 2주의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계속 병원 예약이 잡혀 있었다. 나와 남편이 예약한 병원은 안양에 있어 우리가 머무르는 곳에서는 차로 1시간 이상을 가야 했다. 건강 검진을 받으며 참 빠르고 친절하고 언어 소통이 다 되어서 너무 편했다. 고국에서 누리는 편안함인 셈이었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분이 갑상선과 전문의였다. 검사결과 갑상선에 혹이 2cm가 넘어 조직검사를 하라고 하셨다. S병원은 크리스천 병원이라 선교사들은 특혜를 주지만 의료 보험이 없는 우리로서는 병원비를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의사 선생님께 비용 때문에 검사를 받지 않고 뉴질랜드에 가서 받겠다고 하니 그래도 한국에 나왔을 때 확실하게 검사 받고 가라고 하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아무튼 10여분 기다리니 간호사가 접수되었다고 말해서 금액을 물으니 그 의사분이 직접 코드를 입력하셨기 때문에 정확한 금액은 잘 모르지만 10만원 정도 일거라고 했다. 여러 가지 설명도 친절하게 해 주셨던 그 의사 선생님의 미소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다행히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크기가 커서 6개월에 한번씩 정기 검진을 받으라고 했다. 조직 검사 후에도 이틀간 약을 처방해 주는데 한번에 먹는 양이 다섯 알이 되었다. 뉴질랜드에서 여러 번 조직 검사를 했지만 한번도 약을 처방 받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 의사 선생님과 정반대의 의사 선생님도 계셨는데 산부인과 전문의였다. 무언가를 질문하니 자기가 말할 때는 질문하지 말고 한번 말한 내용 다시 말하지 말라고 퉁명스럽게 말하시는 그분을 보며 예약 환자가 별로 없는 이유가 바로 감지 되었다. 자궁에 혹이 7센치 정도 된다고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수술 받을 수 없다고 하니 좀 지켜 보자고 이 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이 주 후에 다시 의사를 만났을 때 초음파를 보던 그 의사는 난소에 종양이 있다며 ‘아 왜 내가 저번에 못 보았지’하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바로 CT scan을 하라고 했지만 뉴질랜드 오기 이틀 전이라 의사 소견서만 받아가지고 왔다. 이것이 악성 종양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4주간의 여정을 마치고 뉴질랜드로 다시 돌아와 CT 스캔을 하고 피검사를 한 후 GP를 다시 만났을 때 피검사와 CT 결과가 좋지 않아 아무래도 수술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급하게 GP의 소개로 수술의사를 만나 들은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이라 남편과 나는 머리를 얻어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의사의 말이 난소에 악성종양이 있는 것 같고 유방암이 전이되었거나 난소암으로 보여지며 난소의 경우는 조직검사도 할 수 없고 일단 수술을 해 봐야 정확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자궁, 난소와 복부 상피 부분까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전부터 왼쪽 배 부분에 통증이 느껴졌고 불편해 의사들에게 몇 번이나 말했건만 GP나 전문의 모두 별거 아니라고만 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들은 모두 항암을 오래 받아 몸이 약해져서 그런 것이라고만 했다. 내가 그렇게 원했던 CT 스캔을 한번만 유방암 치료 후에 찍었다면 이런 심각한 상태까지 안 왔을 텐데.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사한테 항의 하듯 말했다. “어떻게 항암을 받는 중에 암이 생길 수 있냐고 언제 생겼냐”고 의사는 6개월 정도 아니면 한 2년이나 3년 전쯤이지 않을까 추정할 뿐 이라고만 했다. 위급하니까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의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오랜 치료로 체력이 약해진 나의 몸 상태였다. 일주일 후에 수술 받기로 하고 병원을 나오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 주님은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신 것만 같았다. ‘하나님 지금 저 보고 계신가요? 아버지 저 이제 어떡합니까? 아직 몸도 다 회복되지 않은 상태인데…… 주님 제발 제 옆에서 제 손 꼭 잡아주세요. 주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남편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주님 앞에서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으면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유방암이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는데 내 앞에 또다시 펼쳐져 있는 것은 더 어둡고 긴 터널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몸의 털 하나도 자라게 할 수 없기에 내 몸의 주인 되신 예수님만이 온전한 치유자이심을 고백하며 기도했다. 그 동안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많은 분들께 또다시 기도요청을 드렸다. 기도의 능력을 믿기에 한국과 미국에 계신 분들께도 연락을 드렸다. 특히 카톡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시시각각으로 기도제목을 나눌 수 있었고 많은 분들의 위로와 격려가 함께 해서 감사했다. 그 중에는 혀암 판정을 받으신 어느 목사님이 혀를 자르는 수술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하라고 하니까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을 찬양하고 혀를 자르기로 하고 수술실로 들어 갔는데 놀랍게도 혀암이 완전히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간증이 있었다. 나는 전심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아직도 몸이 다 회복된 상태가 아닌데 또 수술을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고쳐주십시오’ 나는 하나님께 기적을 보여 주실 것을 간구했다. 수술실 위에 침대에서도 그 기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취 주사를 놓기 위해 혈관을 찾는 것이 힘들어 20-30분을 간호사들이 여기저기를 찌르고 여러 종류의 주사바늘을 바꾸어 보았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고 결국 의사가 초음파 기계로 혈관을 찾아 주사를 놓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는 병실로 옮겨져 있었고 코에도 무엇이 쓰여져 있고 양쪽 다리에는 선풍기 같이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마 다리의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해주기 위한 장치인 것 같았다. 수술 후, 하루 동안은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침대 왼쪽에는 통증을 느낄 때 누르기만하면 모르핀이 자동적으로 투여되는 버튼이 있었다. 병실에 누워 있으니 큰 수술을 받았다는 실감이 났다. 하루가 지나자 소변 줄도 떼고 몸에 있던 다른 장치들도 다 제거하니 살 것 같았다. 배 위에는 하얀 거즈로 덮여있는 긴 세로의 특수반창고가 붙여져 있었고 배 부위는 당기고 편안하지는 않았다.
유방암 수술은 가슴 한쪽에 가로 세로 4센치 정도만을 도려내는 수술이었지만 이번에는 몸 속의 특정부분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라 마음이 울적해져 있었다. 수술 후, 의사는 유방암이 전이된 것 같다며 정확한 것은 떼어낸 부분을 조직 검사해야 안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내려 앉는 것 같이 온 몸에 힘이 풀렸다. ‘도대체 내 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주님 어떻게 합니까?’ 내 마음 속에서는 풀리지 않는 물음이 계속되었고 의사와 면담 후 그냥 멍해지기만 했다. 그런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엄마의 미소를 닮은 아주 특별한 간호사를 붙여 주셨다. 수술 첫날에는 움직일 수 없는 나의 몸 구석구석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정성껏 닦아주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그 간호사는 아침이면 방에 들어 와 햇살을 봐야 한다고 커튼도 전부 젖히고 내 손을 잡아주고 걸어야 빨리 회복된다고 수술 후 틈만 나면 병실 밖 복도를 걷게 했다. 때때로 담소를 나누기도 해서 외국에서 치료 받을 때의 이질감 없이 편안하게 병원에서 지낼 수 있었다. 우리의 모든 것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하심에 머리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5일동안 많은 분들이 문병을 와 주셔서 기도해 주시고 위로 해 주셨다. 주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잘 아셔서 사랑을 듬뿍 받게 하셨나 보다. 혼자 있으면 마음이 약해지고 계속 주님을 부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가 감사로 가득 차 올랐다가도 가끔 우울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왠지 모를 평안함이 내 마음 속에 차기 시작했다. 의사의 말은 낙심하기에 충분했지만 내 등 뒤에서 어떠한 강력함 힘이 날 붙들고 있는 듯 했다.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는 것이 분명했다.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인 되신 그분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퇴원 후 수술부위 거즈를 교체할 때 보니 배 위에 커다란 스테이플러가 17개나 찍혀있었다. 세로로 10센치정도의 그 수술 자국은 오래 전 제왕절개로 가로로 길게 난 수술 흔적과 교차되어 십자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내 몸 안에 선명하게 새겨진 십자가 위에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오버랩 되며 수 없이 읽고 외웠던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생각났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난소암 수술을 받은 후 나와 남편은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마른 체구에 아주 예민하게 생긴 수술의는 나의 상태가 난소암 3기 A이며 유방암의 전이가 아니라 새로운 암이 생기 것이라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3기 A의 경우는 자궁 밖으로 전이된 상태이며 나의 경우는 복부 상피세포에 전이된 상태라 육안으로 5미리이상은 수술할 때 제거했지만 그 이하는 아직 남아 있기에 항암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난소암의 경우 거의 자각 증상이 없기 때문에 발견되면 거의 3기이고 예후가 좋지 않다고 했다. 또한 나의 경우는 이미 오랜 투병으로 몸이 많이 약해져 있어 항암을 잘 이겨낼 지가 치료의 관건이라고 하면서 항암의사 쪽에서 연락이 갈 거라 했다. 나는 의사한테 울부짖으면서 말했다 “항암 중에 어떻게 암이 생길 수 있냐”고. 의사는 여러 가지 말로 내게 답변하려 했지만 도무지 수긍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날 보고 계시기는 하신 걸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몸의 상태를 다 아셨을 텐데 내 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엇을 하신 걸까. 주님께 계속 따지듯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없으셨다. 또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계속 멍하게만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이것이 자꾸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 후 4주 후에 항암의사를 만나러 갔다. 전에 항암을 받았던 병원이었는데 새로 장소를 옮겨 훨씬 쾌적하고 모든 시설이 새롭게 구비되어 있었다. 안내 데스크의 세련되게 꽂혀있는 생화는 나 맘과 정반대 너무 환하고 신선해 보였다. 40대 중반 정도의 여자의사는 아주 침착하고 친절했고 곧 이어서 유방암 항암을 받았던 의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의사를 보자 피가 꺼꾸로 솟는 듯 했다. 치료 후에 거듭해서 CT나 다른 검사를 받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애원했겄만 다 거절한 그 의사. ‘작년 모든 치료 후 CT 스캔만 받았다면 초음파만 받았다면 그렇게 내가 원했던 레퍼럴 편지 한 통이면 내가 이 지경까지 안 왔을 텐데. 3기 A로 전이되지 않고 수술로만 끝날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 의사는 나에게 한 묶음의 종이를 보여 주며 참으로 유감스럽다며 암 치료 후 차후 검사에 대한 가이드라인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요지인즉 나의 경우는 그 가이드라인에 근거해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어떠한 검사도 필요치 않다고 보여졌고 과거에도 앞으로도 나 같은 경우의 환자에게는 아무런 검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계속 미안하다고 했지만 미안하다는 말조차 듣기가 거북했고 그 말이 어떠한 위로도 도움도 되지 않기에 그만하라고 했다. 그 의사와 이야기 하다 보니 감정이 너무 북 바쳐 올라 대화가 불가능 해서 새로운 항암의사와 함께 옆방으로 옮겨갔다.
새로 만난 항암의사는 “지금 가장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치료를 받는다면 어디서 받고 싶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내가 뉴질랜드 의료시스템과 의료진에 대해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현재 상황으로는 마음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효과적인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예전 항암의사에 대한 분노가 가슴에 가득 차서 내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감정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 영어로 다 표현하지 못하니 더 답답하고 속상하고 이제는 더 이상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뉴질랜드에서 치료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속 시원하게 의사소통도 되고 좀더 예방의학적으로 치료하는 내 조국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그 다음 주에 그 의사를 다시 만나 항암을 하기로 하고 그에 필요한 포토 캡 수술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 가운데는 불신과 분노가 가득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다 보니까 한국에서는 난소암의 경우 국소적으로 전이된 부분에만 직접 항암을 하는 치료법도 있었다. 그 방법을 쓰면 정말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수술 당일 아침에 수술과 항암 모두 취소하고 의사와 국소 항암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지만 뉴질랜드에서는 그 방법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의사가 한국에서만 치료가 가능하다는 소견서만 써 준다면 보험회사에서 허락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에 있는 의사들과 연락을 했다. 의사들의 첫마디는 거의 한결 같이 치료 비용으로 얼마를 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한국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 작은 검사 하나를 하더라도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유방암과 난소암 항암의 경우 일반적으로 똑같은 항암제로 치료하는데 어떻게 항암 중에 암이 생겼냐는 질문을 하는 의사도 있었다. 한국 의사들과 통화를 하면서 점차 한국에 대한 열망은 사라져갔다. 뉴질랜드에서는 한번도 치료비용에 대해 걱정한 적이 없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분노지수가 올라갈 수록 감사는 점점 바닥으로 추락해 가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투병 중에 함께하셨던 주님께 올려 드렸던 그 절절한 감사들이 다 힘을 잃고 내 믿음은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다시 무릎을 꿇고 주님께 나가 기도 드렸다. 의사도 의료기술도 날 살릴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며 치료자이심을 고백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발생한 일들이 영화 스크린처럼 지나갔다. 그 의사가 내게 한번만 스캔을 하게 해주었다면 한국에서 산부인과 의사가 처음에 종양을 발견했더라면 전이까지는 가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 일들을 반대로 돌려보면 ‘주님께서 허락하셨으면 그 의사가 내 의견을 따라 주었을 테고.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면 첫 번째 초음파에서 이상 소견이 발견되었을 테고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았을 텐데. 그렇구나 이 모든 상황이 주님이 다 허락 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난소암 3기 A로 복부에 전이된 것이 나에게 딱 맞는 상황이었구나. 나의 모든 상황이 다 주님 손 아래 있으니 그 전이된 부분도 주님께서 치료해 주시겠구나. 내가 할 일은 오직 주님만 바라 보는 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머리 속이 정리가 되었다.
그 동안 기적적으로 치유되기를 무척이나 갈망하며 기도해 왔던 내 자신을 돌아 보았다. 기도 중에 성령하나님께서 임하셔서 고침 받는 것은 상상만 해도 너무 좋은 일이기에 틀림없었다. 한번에 싹 낫게 하시면 그 어떤 고통도 부작용도 사라지고 치료자이신 주님의 이름이 높음을 받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주님께 믿고 맡긴다고 하면서 얼마나 내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주님을 제한하고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원하는 때에 응답 받고 싶어하는 모습은 하나님을 온전히 하나님 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너무나 쉽게 우상처럼 대하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하염없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는 나의 죄를 회개하고 나니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항암을 재차 받는다는 것은 나와 가족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겨 주었다. 첫번째 항암을 받을 때는 잘 알지 못하여 용감하게 받았지만 그 고통을 알기에 때때로 두려움이 나와 가족들에게 엄습해 왔다. 또 다시 길고 컴컴한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기차에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 기차의 운전대를 주님께서 쥐셨기 때문에 평안함 가운데 그 길을 갈수 있었다.
항암을 받기 전 CT 스캔을 했는데 수술 후에 바로 찍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오른 쪽 복부 상피에 퍼져 있는 5mm이하였던 암세포들이 9mm 정도로 자라있었다. 치료를 한국에서 받을지 여부를 놓고 결정을 미룬 것이 치료시기를 늦추게 했다. 성공적으로 항암을 받기 위해서는 인공정맥 장치 같은 것을 삽입하는 포토 캡 수술을 해야 했다. 2012년 8월에 포토 캡 제거 수술을 받았는데 1년도 안 지난 2013년 5월 다시 삽입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항암을 4번이상하는 경우나 혈관이 너무 가는 경우는 포토 캡 수술을 해야만 항암주사는 수월하게 맞을 수 있었다.
두번째 항암을 하고 나서 가장 컨디션이 좋은 때인 삼 주째를 맞추어 한국에서 큰 언니와 셋째 언니가 뉴질랜드에 왔다. 셋째 언니는 미국에 사는데 한국 방문 길에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러 와 주었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이 오니까 정말 너무 신나고 즐거웠다. 들고 온 두 가방은 온통 나를 위한 먹거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도 오랜만에 이모들이 해주는 맛있는 음식으로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미국에 사는 언니는 일 때문에 6일정도만 머무르고 갔다. 너무 짧은 기간이기에 못내 아쉬웠지만 큰언니가 일주일 동안 더 있다 가기로 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세번째 항암을 받을 때는 언니가 곁에 있어서 얼마나 고맙고 좋았는지 몰랐다.
나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내 맘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두 언니 보내셔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큰 언니가 한국 가는 날 공항까지 배웅 갔다 돌아 와 집에 덩그러니 혼자 있으려니 눈물이 펑펑 터져 나왔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 줄기가 계속 흘려 나왔다. 소리 없이 얼마를 울었을까. 밖에서 소리가 나서 문을 열었더니 소포 배달이 왔다. 사인을 하고 받아보니 미국에서 Rebecca 라는 분이 보냈는데 나는 생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열어보니 퀼트로 만들어진 핑크색에 하늘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예쁜 이불과 함께 편지와 카드도 들어 있었다.
본인은 미국에 있는 San Clemente 장로교회 교인이라고 소개하면서 교회에서 Quilt Ministry로의 일환으로 나를 위해 손수 교인들이 퀼트로 이불을 만들었다고 했다. 내 병을 주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으며 한 땀 한 땀 믿음으로 만들었다는 너무 귀한 선물이었다. 그 이불 위에는 끈이 있어서 나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그 끈으로 매듭을 만들어 주었다는 Pray Quilt blanket 이라고 했다. 카드에는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많은 분들의 이름과 함께 축복과 위로의 말들이 쓰여져 있었다.
Rebecca는 미국에 사는 언니가 운영하는 피부 관리샵의 단골손님이었고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언니로부터 내이야기를 듣고 교회지체들과 퀼트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니가 얼마나 신실하게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돕고 사는지에 대해 적어놓았다. 한국에서는 대학의 교수로 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상상치도 못했던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사람으로 정금처럼 변해버린 언니가 너무 소중하고 자랑스러웠다. 힘든 사람들을 도와줄 때마다 주님께 자신은 멀리 있어서 혜영이를 돌보지 못하지만 본인을 대신해 주님의 천사들을 통해 도우시기를 기도했다는 언니가 있어 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 언니를 통해서 나를 전혀 알 지도 못하는 미국인들이 나의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인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를 들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니 예수님 믿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 소포는 정말 정확한 타이밍에 도착해서 아쉬움과 자기 연민에 눈물과 콧물에 뒤범벅이 된 나를 안타깝게 보시고 품에 안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세계 각처에서 중보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가 놀라울 뿐이었다. 그리고 연약한 나를 일으켜 세우셔서 지금 있어야 할 자리가 기도의 자리라는 알게 해 주셨다. 그것은 주님 앞에 내 자신을 내려 놓고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자리로 돌아가라는 주님의 손짓이었다.
그날 밤 그 prayer quit을 덮고 기도했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암세포가 다 사라지는 것도 감사하고 그리 아니 하실 찌라도 감사합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다음날 CT스캔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수술 전과 수술하고 항암 전 그 동안 2번의 CT스캔을 할 때는 주님께 고쳐달라고 깨끗하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며 기도했었다. 그러나 스캔 상으로 암은 더 커져만 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마음 한가운데 평안함이 넘쳐 흘렀다. CT 스캔 찍기 전에 특수용액이 섞인 상당량의 물을 10분 가격으로 마셔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암이 있어도 암이 없어져도 상관없으며 주님이 계신 것만으로 충분하다’ 라는 감사의 기도가 내 입에서 계속 나왔다.
특수 용액을 마신 후에는 주사액을 몸에 주입해야 하는데 나의 경우는 정맥을 찾는데 번번히 어려움이 따랐지만 이번에는 한번 만에 정맥을 찾은 것이 참 감사했다. 아프고 나서는 아주 사소한 것 하나에도 주님께 고하고 감사하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너무 연약하기에 주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어서 그분이 내 전부이심이 너무 감사했다. 모든 준비 과정 후 방사선 때문에 간호사들도 다 나가고 윙윙거리는 통 속으로 혼자 들어 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검사를 하면서도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기에 가슴 벅차게 기쁘고 감사했다. 그렇게 주님이 너무 생생하게 살아 계신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감사의 기도가 내 입 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나왔다.
그리고 일주일 후 담당 의사를 만났고 의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스캔 결과는 정상이고 암세포는 보이지 않는다’ 고 말했다. 의사와 나는 서로 부둥켜 안고 기뻐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나를 고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이었다. 의사에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이 이번에는 병 가운데 놓여 죽게 된 나를 구원하신 것이었다.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의 노래가 마음 속 깊숙이 에서 흘러 나왔다.
3번째 항암을 끝내고 받은 CT스캔의 결과로 우리는 “할렐루야”를 불렀다. 그리고 마음 같아서는 거기서 치료를 끝내고 싶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스캔 상으로 암세포가 보이지 않으니 지금 당장 치료를 그만두고 싶겠지만 원래 계획대로 6번의 항암을 다하는 것이 좋겠다.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5번까지는 해야 더 완벽한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남편은 잠시 기도했고 그 말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병에 걸렸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 드린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치유자 되시기 때문에 그 분 앞에 우리의 모든 상황을 올려 드린다.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기적처럼 병 고침 받기를 바란다. 기도했을 때 병이 깨끗이 낫는 것은 생각만해도 신나고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수술 자국도 부작용도 없는 온전한 치유이기에 더욱 그렇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환자들을 초자연적 방법으로 치유하실 때도 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의사를 통해서도 약을 통해서도 그리고 음식과 운동 등의 꾸준한 생활 습관의 변화로도 병을 고쳐 주신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방법 아래 모든 치유가 주님 손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그 분이 내 삶의 주인 이시라는 고백이다. 그 고백이 기도이며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즐거운 일이든지 슬픈 일이든지 어려운 일이든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4번째 항암을 하기 위해 피검사를 했는데 혈소판 수치가 낮게 나와서 한 주 뒤에 다시 검사해 항암 주사를 맞았고 면역력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 면역력을 높이는 주사를 일주일 후에 다시 맞았다. 그럼에도 3주 후 다시 항암을 하기에 내 몸의 상태는 너무 좋지 않았다. 혈소판 수치가 너무 낮아 주사를 맞을 수 없었다. 3주를 기다려 겨우 5번째 항암 주사를 맞을 수 있었지만 밀려오는 피곤함과 몸에 발진이 생기고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의사에게 갈 수 조차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발진 사진을 담당 의사에게 이메일로 보내면 전화로 상담하고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약국에 약을 처방해 두어 찾아오는 형태로 진료를 받았지만 내 몸은 회복할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의사는 나의 의견대로 6번째 항암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길고 긴 항암이 끝났다. 하지만 계속되는 피로감은 깊어만 갔다.
항암이 끝나고 한달 정도 휴식기를 갖고 나서 갑상선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다고 했다. 2013년 1월 한국에서의 건강검진에서 갑상선 혹이 발견 됐지만 조직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받아서 6개월에 한번 초음파로 정기 검진을 받고 있었다. 의사는 “혹 주변에 경계선이 두껍게 변했고 피가 섞여 보이니 수술을 해야 하지만 그렇게 급한 것은 아니니까 서둘러서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암은 아니냐”고 물었고 의사는 “암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급한 수술은 아니라고 해도 왠지 2013년을 끝으로 수술과도 작별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 제일 빠른 수술 날짜를 잡았는데 12월 10일, 내 생일 다음 날이었다. ‘아, 이젠 이 수술을 끝으로 다시 태어나는구나. 새로운 인생을 허락하시니 이젠 주님 안에서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왼쪽 갑상선을 제거하는 수술로 내 목에는 목 주름을 따라 상처가 생겼다. 이제 목까지 땄으니 나는 죽고 예수님만 살고 나는 없고 주님만 있는 인생 살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수술 후 그 의사 명함을 자세히 보니 목, 머리 성형까지 겸하고 있는 전문의사였다. 세밀하게 일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다시 한번 놀랐다. 수술 후에도 의사는 “암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해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숨을 쉬고 수술 일주일 후 의사를 만나러 갔다.
의사는 내게 아주 장황하게 수술 후 조직 검사에 대해 설명하더니 “암세포가 발견되었다”고 하며 “암이 잘 생기는 체질인 것 같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 순간부터 나는 망치에 머리를 맞은 듯 아무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암이 아닌 것 같다고 해 놓고 어떻게 또다시…’ 나중에 생각하니 의사도 본인이 했던 말 때문에 그렇게 빙빙 돌려 결과를 이야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당분간 운전하지 말라는 주의 사항 때문에 같이 동행한 집사님한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계속 중보기도 모임을 하며 같이 기도해 온 나이는 어리지만 속이 깊은 그 집사님의 얼굴을 보며 우리가 기도했던 수 많은 기도에 응답하셨던 주님 생각이 났다. 암이 아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그 응답 앞에 서 있는 나는 그저 고개를 떨구며 ‘주님 세번째 암까지 완전히 치유하신 건가요?’라고 물었다.
지치고 상한 맘으로 집에 돌아 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어 ‘주님’만 계속 불렀다. 주님만 바라봤다. 내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주님께 올려드렸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참 신기하게도 오후가 되니 힘들어서 요동치던 마음이 평안해 졌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 처절한 몸부림 뒤에 감사의 기도가 흘러 나왔다.
뉴질랜드처럼 병 발견하기 쉽지 않은 나라에서 세 가지의 암을 발견케 하시고 치료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했다. 내 몸 상태로 이길 만큼의 치료법을 주신 것도 감사했다. 갑상선은 차후 치료 없이 수술과 약 복용만 하면 되는 아주 초기 암이라서 감사했다. 수술 후 목소리 변화나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것도 감사했다. 내 마음은 어느새 감사의 물결로 가득 찼다.
참 이상했다. ‘내 스스로는 이렇게 평안하고 감사한 기분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세번째 암 판정을 받았는데도 감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아주 확실하게 드는 마음은 눈물로 기도하시는 많은 분들의 중보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이 땅의 중보자들의 기도가 죽어 가는 자들을 생명으로,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을 빛으로,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는 강력한 힘의 원동력이었다. 그 기도가 절망 속에 있는 나를 소망으로 이끌어 주었다.
갑상선 암 수술을 하고 6주 후에 피검사 후 수술 의사를 만났다. 한쪽 갑상선을 제거한 후 얼마나 몸에서 자연적으로 호르몬이 나오는가를 보고 약으로 호르몬 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만남이었다. 나와 같은 경우는 갑상선 약을 한 알씩 공복에 먹어야 한다고 처방했다.
수술 후 6주간은 거의 아침에 일어 나기 힘들고 피곤했었는데 약을 먹기 시작하자 그러한 증상이 차차 없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빈 속에 미지근한 물 한 컵과 함께 약을 복용한다. 한 알에 24시간 효과가 지속되는 작은 알약을 먹으면서 내 영혼을 위한 약도 그렇게 꼬박꼬박 먹기를 소원한다. 그리스도인이 먹어야 할 평생의 약, 신양과 구약,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 영혼이 강건해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그 신비의 약을 나는 매일 매일 먹을 것이다.
3개월만에 정기 검진으로 담당 항암의사를 만났을 때 갑상선 수술까지 암으로 판정이 나자 의사는 내게 3개월에 한 번씩 MRI로 몸을 검진해야 한다고 했다. 가슴부분과 배 부위를 두 차례로 나누어 하는 검사는 CT 스캔과 다르게 굉장히 시끄러웠다. 검사 전에 미리 소음이 있으니 헤드폰과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 틀어 주긴 하지만 기계로 땅을 파는 것 같은 소음은 너무도 심했다. 거의 40분 정도나 그 이상을 촬영하는데 자석을 이용해 찍는 것이라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 장점이라고 했다. 나의 경우 작년 일년 간 거의 3개월에 한 번 꼴로 CT 스캔을 했기에 더 이상의 방사선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의료진의 결정이었다.
MRI를 이주간에 걸쳐 찍고 나서 다시 3개월 후에 찍어야 한다는 것은 악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일 주일 후 결과를 보기 위해 의사를 만났는데 영상이 깨끗하게 나오지 않아 다시 찍어야 한다고 했다. 배 부위는 금식도 해야 하고 4시간 전부터는 물도 마실 수 없고 다시 그 소음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무거웠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보통의 경우 한번 촬영으로 자연스럽게 결과가 나오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 생각과 동시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를 더 정확히 알기 위해서 찍으니 감사하고 다시 찍을 수 있는 체력이 되어서 감사하고 내가 비용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 감사하고…’ 한번 감사를 떠 올리자 감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 올랐다.
세 번의 암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가장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감사에 대한 나의 태도였다. 예전에 나는 하나님이 들어 주신 것들에 대해서만 감사했다. 내 삶의 주인이 내 자신이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 응답되었을 때는 너무 기쁘고 감사했지만 상황이 나빠지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금새 마음이 요동하고 실망하고 불평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가운데 계시며 모든 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
성경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처럼 작은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지면 자라서 열매를 맺으며 그 열매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는 것처럼 감사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것 하나에 감사하게 되면 또 다른 일에 대한 감사가 생각나고 그 감사의 물줄기가 내 인생 전체를 통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게 되었다.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이며 어떤 일이나 사건의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실 주님을 기대하는 것이다. 주님을 기대하기에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절대감사’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누리며 살게 해 주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의 중심이 주님께 향하고 그 분을 바라 볼 때 예전에 누리지 못한 기쁨과 평안이 넘쳐 흘렀다.
거의 2년 반을 꼬박 아팠기에 다시 살아 가는 하루는 이전에 살던 하루와 확연하게 달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누운 자리에서 소리 내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루를 연장시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는 감사 기도로 하루를 연다. 아이들 도시락을 싸 줄 수 있다는 것이 내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두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예전에는 미처 알 지 못했다.
한창 공부하고 일 할 때 유치원에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하려면 정신 없이 아침 준비하고 아이들 도시락 챙겨 놓고 정작 나는 밥도 못 챙겨 먹고 집을 나서기 일쑤였다. 출근 시간에 맞추어 바쁘게 운전해 가다 보면 창 밖으로 보여지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뛰거나 걷는 사람들이나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언제나 저렇게 여유롭게 살 수 있을까’ 하며 부러워했다.
그때 누릴 수 없다고 여겼던 그 여유로움을 나는 요즘 만끽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뉴질랜드는 근처에 걸어 갈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 있어서 거의 매일 아침 1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걷기로 마무리한다. 걸으며 묵상하는 그 시간은 주님과 데이트하는 달콤한 시간이다.
겨울의 끝자락에 작은 숲 길을 걸을 때면 앙상하게 가지만 무성한 나무들이 보였다. 나뭇잎이 푸르고 풍성하게 달려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작은 가지들과 부러진 부분들이 겨울철에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보여졌다. 모든 잎들이 사라진 뒤에야 나무의 참모습이 보여져 잘라내어야 할 가지들, 썩어 있는 부분들과 병 든 부분들도 찾아 낼 수 있다. 그래서 봄이 오기 전에 가지치기를 해서 필요한 부분은 베어내고 너무 많은 잔가지는 쳐내는 전문가들의 손 끝이 닿은 후에야 그 나무들은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잎사귀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무들에게 겨울이 앙상한 가지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암이라는 모습으로 고통이 찾아 왔을 때 앙상하게 메말라 비틀어진 나의 연약함과 믿음 없음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참모습이었다. 나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으로 무릎 꿇었던 바로 그 때 비로소 온전하게 주님을 바라 볼 수 있었다. 신실하신 주님께서는 에스겔서에 나오는 골짜기의 마른 뼈 같은 나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고 고치셨고 회복시키셨다. 내 인생의 겨울은 영영 끝날 것 같지 않고 길고 춥게 느껴 질 때도 있었지만 그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주님은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감사의 계절로 만들어 주셨다.
공식적인 치료를 다 끝내고 3개월마다 피검사와 때에 따라서는 MRI를 찍거나 하는 검사를 하고 의사를 만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다른 병도 마찬가지겠지만 의사들은 암은 전이라든가 재발의 위험성을 가진다는 것을 항상 강조하며 현재 암세포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완치는 아니라는 입장을 보여준다. 그래서 갑자기 이유 없는 통증을 느끼거나 몸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암환자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히곤 한다. 나 또한 그러한 사소한 것에 민감하고 어쩔 때는 남편이나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혼자만 속으로 꿍꿍 앓을 때도 있다. 세미한 통증이나 이상 증후는 여러 가지 생각을 덧붙이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정적인 마음과 암울한 장래를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성경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34)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을 적용해 볼 때 때때로 다가 오지 않은 미래에 생기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 놓고 마음 속은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다면 주님께서 일하시고 싶어도 일하실 수 있는 영역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딱 하루만 잘 살기로 결정했다. 하루가 주는 의미가 예전보다 더 절실하고 감사하기에 아침에 일어나면 눈뜨자 마자 기도한다. “주님, 오늘도 생명을 연장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살기를 기도합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며 어제 실패하고 좌절하여 쓰러졌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하루가 있어 참 행복하다. 그 중에서도 뉴질랜드의 아침은 지저귀는 새소리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하늘이 있어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충분한 상큼함과 생동감을 준다.
치료를 마친 후 새롭게 살기를 다짐한 나는 먼저 내 자신을 잠잠히 진단해 볼 필요가 있었다. 암은 습관의 병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평소 식습관과 생활습관에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잡아서 좋은 습관으로 고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예방책인 것이다.
첫번째 식습관을 바꾸었다. 인스턴트나 가공 식품은 먹지 않고 웬만한 음식은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첫번째 암 판정을 받고 미국에 사는 셋째 언니가 나의 병에 도움이 될까 해서 바쁜 와중에도 채식 요리 강습회에 일주일에 두번 나가서 배우고 나면 요약해서 사진과 함께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실제적으로 언니가 채식으로 바꾸면서 몸이 많이 좋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모든 치료 후에 의사와 상의해서 부분적 채식을 하다가 점차적으로 채식으로 바꾸어 갔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 때 6개월 정도 지나야 그 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건강 상태에 맞게 음식을 조절해야 하며 수술 중이나 항암 중에는 단백질 섭취가 중요하기 때문에 권하고 싶지 않다. 물론 아이들 음식을 따로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에 너무 엄격하게 나의 식단에 매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외식을 하거나 초대를 받아서 식사할 때는 기쁘고 즐겁게 맛있게 먹는다. 가장 중요한 식습관은 주님께 늘 감사하며 먹는 것이다.
두번째로 거의 매일 아침마다 운동을 하게 되었다. 가끔은 아시는 분들과 같이 걷기도 하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걷냐?”고 묻곤 한다. 그 이유는 절실함 때문이다. 운동으로 내 몸의 구석구석을 활성화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에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매일 아침 근처 공원에서 중국 인들과 함께 태극권을 한다. 처음부터 그냥 따라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거의 50분 정도에 걸쳐 행해지는 느린 체조 같은 느낌의 동작은 혈액순환과 몸 균형에 좋다고 하지만 초반에는 한 발 들고 서는 동작 조차 힘겨웠다. 그러나 집에서 나 혼자 몸을 움직이는 체조를 50분 정도 할 리 만무해서 거의 매일 같이 하고 있다.
하루는 항상 앞에서 리드 하시는 분한테 고맙다고 했더니 “자기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다. 이유인즉 자신은 크리스챤인데 태극권을 통해 하나님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 태극권을 배우는 많은 중국인들 가운데 복음이 전해지기를 소원한다.
세번째로 내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다. 병 중에 있는 동안 큰 아들이 사춘기를 보냈지만 신경을 써줄 여력이 없었다. 엄마가 아프니까 본인이 힘들다는 이야기도 못하고 치료가 끝나고 좀 괜찮아지니 심하게 반항하기도 하고 대화를 거부하기도 하는 아이를 보면서 너무 힘들고 속이 상했다. 내가 어떻게 해 보려고 애써도 안 되고 본인 하고 싶어하는 것만 하려고 하는 아이를 보면서 아이가 학교 가고 나면 아이 방에 엎드려 통곡하며 기도했다. 내 인격과 성품으로는 도저히 그 녀석에게 잘 대해 줄 수 없기에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주인 되지 않으시면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나는 아들을 사랑하기에 장래를 생각해서 더 잘 되라고 하는 것인데 이 아이는 내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루는 기도하는데 ‘이 아이는 내게 어떤 존재인가.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선물이며 이 세상 살면서 섬기라고 주신 대상인데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라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좋은 아들을 원하면서 아이가 생각하기에 좋은 엄마인가. 과연 그 아이 입장에서 느끼는 엄마는 어떨까’라는 물음이 생겼다.
나는 좋은 엄마와 행복한 아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한번도 내 남편과 아이들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발상인가. 아이의 문제로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한없이 이기적인 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내 관점에서 아이를 바라 볼 때는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 아이를 바라 볼 때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내게 다이아몬드 원석을 두 개 주셨고 이 세상 살면서 그 다이아몬드가 잘 컷팅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보석들로 그 분의 영광을 위해 빛날 두 아들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이다.
며칠 전 정기 검진이 있어 병원에 갔다. 첫번째 암 진단을 받은 지 벌써 3년이 되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병원에 가는 것이 이제는 익숙할 법도 한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병원에서 정기검진이라 예약하라는 편지에도 차일 피일 미루다 전화를 걸어 예약하고 의사를 만나러 갔다. 가는 도중 왜 아직도 병원에 가는 것이 피하고 싶은 일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곰곰이 나의 속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그 동안의 치료가 부담이 되어 이젠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분명한 것 한가지는 나는 너무 연약하기에 사소한 일 하나에도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주님을 부르며 그 분 앞에 내 상황을 올려드려서 내 안에 나는 없어지고 주님으로 가득 찰 때야 비로소 평안이 찾아 오는 것이다.
1년 만에 유방암 수술을 집도한 의사를 만났다. 내 마음 상태나 요즘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진을 받았다. 그 의사는 내 몸 구석구석을 체크하다가 겨드랑이 밑에 무언가 만져진다며 수술한 자리였는데 예전보다 좀 두꺼워진 것 같다고 검사를 하라고 했다. 그 날 따라 비바람이 세차게 치는 날이라 환자가 별로 없어서인지 예약 없이도 30분 정도만 기다리라고 했다.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데 마음에 낙심이 됐다. ‘올 4월 MRI 검사에서 이상 없다고 나왔는데 도대체 또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난 의지적으로 주님을 계속 불렀지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습된 일말의 사건에 대해 갖는 나쁜 기억 들이 내 생각위로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 나는 또 나한테 집중하고 있구나. 내가 아닌 주님을 봐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의 주인은 주님이시니 문제가 생겨도 주님이 해결하실 것’이라는 마음이 들자 그 동안 주님께서 세번의 암 치료 중에 행하셨던 수 많은 일들이 떠 올라 감사가 터져 나왔다. 어떠한 순간에서도 절대로 나를 놓지 않으시고 붙잡고 계시는 크고 강하신 아버지의 손이 그 순간에도 나를 붙잡고 계심에 감사했다.
엑스레이를 찍고 조금만 기다리라는 소리를 3번 들은 후에야 초음파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삐삐 거리고 뚜뚜 거리는 기계 음과 함께 하는 검사는 길게만 느껴졌다. 검사 후 결과는 이상 없음이었다. 할렐루야 감사를 외쳤다. 검사가 진행되고 결과 나오는 1시간 30분 동안 마치 나의 영혼 또한 스캔 되어 검사 되고 있는 듯했다. 나의 믿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안 좋은 일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았다. 닭 울음 소리에 통곡했던 베드로처럼 말이다.
요즘에 나는 조금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거나 하면 곧바로 피곤이 밀려온다. 올 10월 호주 시드니에서 있었던 목회자 세미나를 남편과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거의 2년 만에 비행기를 타고 하는 첫 여행이고 아프고 난 이후에 주님께 ‘아버지 이제 외국에 나갈 일이 있으면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로 나가고 싶어요’ 라는 기도가 이루어져 감격스러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빡빡한 일정에 좀 버거웠지만 너무도 유익하고 즐거웠으며 많은 도전과 감동이 있었다. 세미나를 섬기시는 분들 중에는 암이 3번 재발하셔서 치료 중인데도 열심으로 밥하시는 권사님이 계셔서 도전이 되었다.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사시는 장로님과 권사님을 보며 눈시울이 붉혀졌고 나의 병력을 아신 권사님이 도리어 나를 위로하시기에 “권사님 우리는 하나님이 꼭 집어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들 이예요” 하며 안아 드렸다. 암이 아니라 주님께 집중하며 사시는 두 분이 너무 아름다웠다.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뉴질랜드로 돌아온 나는 몸이 시름시름 아프고 힘이 없었다. 너무 연약한 나를 볼 때 속상하기 보다는 내가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주님이 계셔서 감사했다. ‘아버지, 저는 연약해서 아버지가 힘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아버지 힘과 능력을 허락해 주세요. 아버지 이제 저는 주님 껌딱지가 되어 살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라는 말씀처럼 주님만 바라보는 주바라기의 삶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호주 갔다 와서 여독이 안 풀린 상태인데 계속 집에 초대해서 음식으로 섬겨야 할 일이 있었다. 할 일은 태산이고 몸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싱크대에 서서 ‘아버지, 제가 과욕을 부르는 걸까요? 저는 주님을 위해서만 살고 싶어요’ 하면서도 ‘내 사명은 밥하는 것인가. 밥하라는 사명이라도 받았단 말인가’라며 투덜거리는 찰나 ‘그래 밥집이 사명이지. 주님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잖니. 베들레헴의 뜻이 떡집, 빵집이니 밥집도 되쟎아. 주님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으로 이 세상 밥으로 오신 것’ 이라는 생각과 함께 ‘밥 집 주인이 몸 힘들다고 식당 문 닫을래?’ 주님이 내게 물으시는 것 같았다. 나는 금새 웃으며 ‘주님, 주님의 밥 집에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맘껏 일하세요.’ 싱크대 건너편 식탁에 주님이 앉아서 웃고 계신 것 같았다. 나는 스쳐가는 청년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지만 그 식탁의 주인은 주님이셨고 섬김이 필요한 그들과 함께 그 자리에 앉아 계셨던 것이다.
이 소망일기를 연재한지 1년이 가까워 오고 있고 이제 이번이 마지막이기에 부족한 나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 주셨던 많은 독자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린다. 나의 연약함이 주님의 강함이 되시기에 부끄럽지만 그 동안 이 일을 감당했던 것 같다.
이 땅의 마지막 날이 천국의 첫날이기에 죽음은 끝이 아니라 소망이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주님께 “내가 너 살린 것 참 잘한 일이다! 수고했다 충성된 딸아” 라는 말을 꼭 듣고 싶다. 무거운 세상의 짐 속에서 미친 듯이 열심히 살았지만 나는 주님을 잘 몰랐다. 세번의 암을 통해 나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랑이시며 진리 그 자체이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경험하며 새롭게 사는 내 인생의 후반전은 오직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 온 재산을 다 팔아 보물이 묻혀 있는 땅을 산 사람처럼, 그 보물 되신 주님과 함께 나는 오늘도 호흡하고 웃고 밥 먹고 이웃과 더불어 산다. 자연도 사랑도 돈도 관계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주님이 계셔 이 세상은 살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