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행참(左行參; sit, walk, stand)
at 2025-04-11 16:13:59.0 / 381 조회수몇 일전에 오랜 전부터 기도모임으로 만나고 있는 사역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일선에서 목회하기 전에는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졌었다. 지금은 각자의 사역이 바쁘다 보니, 이벤트성을 가지고 만나 교제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번 만남에서 가졌던 대화 중에 가장 연장자인 멤버를 통해 좌행참이란 단어를 처음 들어보았다. 무슨 철학적인 단어인가 싶어 스치듯이 듣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의도를 가진 듯이 반복적으로 언급을 하였다. 그래서 그 뜻을 물어보았다.
복음의 불모지 같은 땅 그리고 요즈음 필자가 많이 싫어하는 나라인 중국의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인 워치만 니(Watchman Nee)에게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짧고 간단한 세 글자에 숨은 뜻을 듣는 순간 스펀지처럼 나의 뇌는 반응하였다. 단어적인 의미는 ‘왼쪽으로 행하여 참여한다.’는 말이다. 챗GPT에게 물어보니, “자신을 낮추고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태도”라고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지금은 복음이 말살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중국에서 워치만 니와 같은 영성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유독 이 말이 많이 곱씹어진다. 좌우 중에서 우를 선호하는 세대 속에서,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영성이기에 더더욱 의미가 깊어진다.
필자는 매년 정기적으로 맞는 새해, 부활절, 감사절, 성탄절 등등의 절기가 가까워지면 그 의미를 되돌아 본다. 의미나 개념을 몰라서가 아니다. 기독교 안에 많은 교회 절기들을 나는 얼마나 진지하고 올바르게 숙지하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싶어서 이다.
부활절을 예로 들어보면, 부활의 영광을 환호하고 기뻐한다. 하지만 그 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특별한 일주일, 고난은 최대한 무시하고 싶어한다. 글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 같다. 정직한 고백으로 매년 주어지는 고난주간이 나는 많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왠지 슬퍼해야 할 것 같고 왠지 나를 괴롭게 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본질적으로 반골기질을 가진 성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의 심장은 반응한다. 구원의 기쁨이 있고 부활의 소망이 있는데 억지로 왜 불편하고 괴로운 고난을 연습하느냐고? 그렇게 하나의 심장에서 우심방과 좌심방은 작은 전쟁을 치른다. 그리고 결국엔 우심방이 이긴다. 그리고 좌심방은 겸손의 자리로 내려간다.
이 한 주간 워치만 니가 깨닫고 겸손의 자리인 왼쪽을 선택하고, 그리스도가 친히 보이신 고난의 길, 십자가를 함께 지고 살아보고자 결단해 본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가지려 했던 세상 일들, 이젠 모두 다 해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다 버리네~ 내 안에 가장 귀한 주님을 위해서~ 나에겐 믿을 수 있는 특권과 주님을 위해 고난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