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사도 바울이 걸었던 발걸음을 뒤 따라
at 2022-02-07 13:30:00.0 / 1741 조회수낮 시간 동안 강렬하게 떠있던 태양이 장렬히 사라지며
석양의 노을 빛을 발한다.
저 빛을 보면서 나는 묵상한다.
아침에 떠올랐던 해가 지는 곳까지,
나는 그 안에서 먹고 마시고 살아가리.
나는 그 안에서 이생 속에 숨쉬고 살아가고,
삶의 여정 속에 사명을 감당하리.
떠오른 태양이 저 모습대로 지는 것처럼
이 몸도 사명을 다하고 저 석양처럼 빨갛게 지고 싶으이.
앙상한 나무의 소망으로 기억되며…
– 터키에서 첫 날
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하고 모범이 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나는 이런 교회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다. 그러던 중 14년 간의 부교역자 생활을 넘어 2009년 개척 교회를 시작하였다. 뒤돌아보니 당시엔 건강한 교회에 대한 사모함만 있을 뿐 명확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시작한 목회는 2011년 아내의 암투병으로 시작하여 2015년 암치병으로 끝날 때까지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었다.
그런 중에 멘토 되시는 선배 목사님의 도움으로 2014년 가정교회 세미나를 다녀왔고, 어렴풋했던 교회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신약교회의 모습이었다. 구약 성경을 발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위에 세워진 신약교회, 일명 초대교회를 살펴보면서 목회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목회 2회전의 길에서, 1993년 주님의 인도를 따르겠다고 시작한 신학 공부 중에 아련하게 꿈꾸었던 성지순례가 생각이 났다. 이것을 꿈만 꾸다가는 일장춘몽으로 끝나겠다는 결론 아래, 뜻을 함께 한 동료 목사님들과 매달 100불씩 꿈을 저금하기로 하였다.
D-day는 2020년 2월로 하고 약 3년 전인 2017년부터 기도 가운데 소망을 드렸다. 그렇게 준비해서 이스라엘 성지를 가려고 구체적으로 준비하던 때, 이스라엘 성지는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서 급하게 찾은 곳이 ‘사도바울의 발자취를 찾는 선교의 여정’이었다. 특별히 마음에 끌렸던 부분이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일곱 교회였었다.
1996년 사역을 시작한 이후, 그리고 2009년 단독 목회로 11년 차에 있던 나는 그곳이 참으로 가보고 싶었다. 모두가 공감하듯이 현장에서 주는 그 무엇인가를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12개월 동안 1993년 신학을 시작 이후, 27년 만에 다녀온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에서 일곱 교회에 대한 성지순례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던 사도행전이며 복음행전의 중심에 있는 신약교회를 조명하고자 한다.
그 장황한 이야기를 풀기 전에 꼭 언급해야 할 간증이 있다. 그렇게 소원하는 성지순례는 나에게 단순한 여행이 될 수 없었다. 특히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할 부분인 경비 부분 때문이다.
3년 동안 한 달에 100불씩 모았던 금액은 대략 3,300불로서 항공료를 지불하고 나면 끝이었다. 당시 부부 동반으로 가는 계획을 세웠고 부부 별로 대략 10,000불(한화 800만원)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 나머지 비용을 공급하심이 간증의 핵심이다.
성지순례를 위해서, 2019년 6월 이후로 새벽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목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절벽 앞에 선 사람처럼 주님과의 독대가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300용사와 함께 주인공이 되었던 사사 기드온을 떠올리며, 그가 감행한 기도법을 따라 기도했다. 그 기도의 중앙에는 경비 부분이 있었다. 출발 2개월 전인 11월경에는 여정을 위한 중도금을 지불해야 했기에 사용 가능한 신용카드에서 선 지출을 하였다. 이런 모습에 아내는 자신은 빠질 것이고 혼자만 다녀오라고 선포하며 말없는 저항과 약간의 핍박(?)까지 더해 졌다.
결국 일곱 교회를 향한 여정을 위한 출국이 8일 앞으로 다가온 다음에야, 혹자는 이해하지도 못할 기적이 일어났다. 지면상 모든 이야기를 풀어 놓을 수 없음이 많이 아쉽다. 당시 나는 본 여정이 현재 목회의 마지막 일정일 수 있다는 각오가 있었다.
목회 가운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하심을 구하고 찾고 있던 나에게, 2020년 1월 15일(수) 낮 시간에 한국에서 지금껏 듣고 보지도 못한 5명으로 구성된 “119 선교지원팀”이 왔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분이 누군지 지금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더 자세한 간증은 다른 기회가 있어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 수요일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일행 중에 대표이신 여목사님이(여차저차하여) 하나님께서 이 돈을 주라고 하셨단다. 현금으로 NZ$ 3,150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날인 일요일 아침에 남은 NZ 달러를 받은 것까지 다 하니 약 3400불이 되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 구했던 기도의 응답으로 받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섬기는 교회와 교우, 그리고 지인들의 섬김으로 여행에서 필요한 일부를 채워 주셨다.
이런 따끈한 간증을 한국에 도착 후,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1월 24일 아침 식사 때, 함께 여정에 참여한 일행들과 나누고 터키를 향한 비행기에 올라탔다.
결정적인 것은 한국에 가서 돌아오기 며칠 전에 한 지인께서 NZ 달러 4,000불을 공급해 주심으로 모든 경비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해결이 되었다.
각자의 목회 현장을 떠나 소원하던 성지순례의 길을 향하는 마음은 행복하였다. 물론 그 행복은 성지순례에서 “순례”라는 단어를 깊이 있게 숙고하지 못한 너무 이른 행복감이란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9박 10일 일정 안에 약 20,000킬로의 여정은 터키라는 나라를 이해하지 못한 나의 무지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이런 여정을 사도 바울은 당시에 대부분 걸었고 때로는 말이나 마차 혹은 배를 타고 다녔을 것이다.
물론 중간 중간에 몇 개월씩 머물고 때로는 1-2년도 지냈다고 하지만 참으로 멀고도 험한 여정이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모든 일정이 일명 4-5-6(혹은 5-6-7)으로써, 새벽 4시에 기상하고 5시 식사하고 6시에 출발이다. 그리고 저녁 식사 정도에 다른 숙소에 도착한다.
사랑하는 아내하고 여유롭게 앉아서 대화하거나 사랑을 속삭일 틈도 없이 바빴다. 특히 주 이동 수단인 버스 안에서 주로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은 너무 길어 굉장히 많이 힘들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신약교회를 찾아서”를 시작해볼 것이다. 우리 일행은 단독으로 터키에서 약간의 시간을 가졌다가 호텔에서 새벽 04:30 출발해서 공항에 05:10 도착하여 10일간 함께 할 일행(31명)과 만났다.
아침 08:14에 이륙해서 키프로스(성경: 구브로)의 에르칸(Ercan) 공항에 도착해서 첫 번째 일정이 바나바의 묘지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다른 일행은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가장 의미있고 뜻 깊은 곳이었다. 그 이유는 성경 전체에서 내가 닮고 싶은 성경 인물이 바나바이기 때문이다. 위로자라는 닉네임을 가진 바나바의 자세를 닮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다.
개인적으로 사역을 감당하면서 소원하는 바는 바나바처럼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고 싶다. 사울이 바울이 되는 과정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 바나바의 영성을 현장에서 묵상할 수 있었던 것이 지금도 여전히 최고의 감사이다. 당시의 마음을 정리한 시상은 아래와 같다.
위로자 바나바의 무덤 앞에서는
나의 생을 다한 뒤 모습을.
바나바를 기념한 교회 안에서는
사역의 뒷자리와 열매들을.
수도원의 예배당 안에서는
높이 자리잡은 강단에서 말씀의 권위를.
바나바 무덤 이미지 살라미(사도행전 13:5)에서는
복음의 첫 시동 소리를.
첫 날 일정을 지나고 다음날에는 다시 비행기를 타고 터키의 남동쪽 맨 아래 육지인 아다나(Adana) 공항에 내렸다. 그곳에서 신약교회의 발판을 다진 사도 바울의 생가 터라는 곳을 방문하고 그곳의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려서 물을 마셨다. 그리고 앞으로 사도 바울이 걸었던 발걸음을 뒤따를 마음의 준비를 다지며 숙소에서 둘째 날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