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사랑으로 가득 찬 빌라델비아 교회
at 2022-02-07 13:46:14.0 / 1467 조회수터키 공항에 도착하고 순례의 여정에 오른 후, 얼마 지나면서 가는 곳마다 현지인들의 시각과 반응이 이상스러웠다. 원래 터키 사람들은 ‘형제의 나라’라는 인식 때문에 한국 사람들을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지만 ‘자신들이 형이고 한국인이 아우’라고 생각한단다.
아무튼 그들은 일상에서 길을 가다가도 친근감 있게 함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할 정도로 우호적이다. 그런 그들이 우리 일행들이 움직일 때, 입을 가리거나 거리를 두려고 했다. 왜일까?
맞다! 그때부터 코로나 19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 심각성을 당시 그 누가 짐작을 할 수 있었겠는가?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들른 후 뉴질랜드로 돌아오고 나서 2주만에 하늘 문과 길이 닫힌 후에야 실감했다. 우리 부부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고 성지순례의 여정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간증이다.
우리 순례자들은 일명 4-5-6 Morning Start 일정을 가졌다. 4시 기상하고, 5시 아침 먹고, 6시에 차를 타고 출발하는 일정을 말한다. 날씨는 겨울 날씨답게 매우 추웠다. 성지여행과 순례는 개념상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체험하게 했다.
새벽공기를 마시고 숙소를 나와서 어두움을 가르며 ‘형제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달려갔다. 그 이름처럼 서로 사랑하며 말씀을 굳게 지킨 교회, 그리고 예수님의 칭찬만 들었던 교회의 흔적을 향해 피곤한 몸을 버스에 싣고 달리고 달려갔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성 요한 교회(ST. JEAN CHURCH)였다. 그때 도착 시간은 아침 7시 25분 정도였다. 간판과 허물어진 건물뿐인 이곳을 새벽잠을 설치고 왔건만 그 문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었다.
성 요한 교회
잠깐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뭐지?” 이런 생각 속에서 순례자의 한 사람으로 나중에 이런 마음의 기도를 드려 보았다. ‘주여, 허물어진 믿음을 고쳐 주옵소서. 무너지고 굳게 닫힌 심령들을 깨우소서. 철옹성 같은 아집 속에 가둔 사랑을 자유하게 하옵소서.’
그 전날에 책망만 들었던 라오디게아 교회와는 아주 상대적인 빌라델비아 교회를 찾아왔는데 그 교회는 없고 성 요한 교회가 있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기 전까지 실망감은 생각보다 컸었다. 큰 지진도 이유가 되었고 무슬림이 제국을 다스린 이유도 있었다.
그런 역사 속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사라졌고 대신에 성 요한 기념교회로 남아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졌었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던 교회이다.
인내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주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약속과 함께 시험의 때를 면할 것이라는 축복을 받았다(요한계시록 3장 7절-13절).
신약교회를 찾는 순례자로서 바라본 빌라델비아 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모범이요,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일행이 도착해서 본 남아 있는 교회의 터를 보면, 오늘날 우리들의 동네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크기라고 판단된다.
이 교회는 다른 사데 교회나 에베소 교회에 비하면 아주 작은 교회였다. 작고 힘이 없었지만 공동체를 중심으로 견고하게 선 교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견고한 신앙의 기초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었다.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 견실성이 이 신약교회 공동체를 지탱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특별히 이 교회공동체가 설 수 있었던 중심 기둥은 지체들 간의 사랑으로 견고했던 것 같다. 문자로만 보던 일곱 교회 중에 하나인 빌라델비아가 ‘형제의 사랑’이란 뜻을 가진 교회공동체로 실감 나게 다가오는 경험이었다.
잠시 들렸고 보았던 교회를 보며 성경의 말씀을 매칭(matching)하듯 연결하고 나니 뭐랄까? 알 수 없는 위로가 나에게 주어졌다. 10년 넘게 개척교회 규모의 교회공동체를 섬기면서 교회 규모에 대한 나름의 부담이 있었는데 그 부담에서 알 수 없는 자유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약교회를 보면서 깨닫는 것 중의 하나가 교회는 크고 작은 것의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능력(달란트 비유처럼)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얼마만큼, 그리고 어떻게 행하느냐인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첫 번째 확신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것은 ‘형제의 사랑’이란 것이다. 무슨 소리하나 싶은 독자가 있을 듯하다. 당연한 것을 마치 지금 깨닫는 것처럼 말한다 싶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한 걸음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해를 할 수 있을 듯하다.
최근 교계에 상징적으로 회자되는 문구가 있다. ‘사랑의 교회에 사랑이 없다.’ ‘명성교회가 명성을 잃었다.’ ‘소망교회에 소망이 날아갔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깊이 있게 되새겨 볼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 사랑에 있어 첫날 보았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중도를 선택하여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으로 책망을 받았다. 나중에 보게 될 에베소 교회는 사랑을 잃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는 성도 간에 사랑이 두터웠고 사뭇 열기까지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세월이 지난 후에 이 교회의 터 위에 사도 요한을 기념하여 성 요한 교회라고 이름을 바꾼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사도 요한이 누구인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 마지막까지 살았고 사도행전의 역사를 모두 보고 체험한 사람이다.
신약성경의 맨 앞, 세 개의 복음서가 쓰인 다음에 증보판 형식으로 쓰여진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적은 복음서들 위에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 이후에 보혜사 성령님이 함께 하신 것을 보충해준 사람이다.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소개한 그는 밧모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생의 마지막쯤에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를 보며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쓴다. 교회공동체는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인 것 같다. 언급된 교회 중에 여섯 번째 교회가 본인이 직접 가서 본 빌라델비아인 것이다.
신약교회에서 칭찬받고 인정받아 모범이 되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모습, 그 중심에는 성도들 상호 간의 사랑이 있었다. 가로와 세로 각각 20m 정도인 교회를 한 바퀴 둘러보며 한 가지가 보였다. 누구든지 볼 수 있는 두 개의 기둥이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보았다. 그리고 말씀이 생각났다.
주어진 믿음을 굳게 잡으면 생명의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며 승리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신다(요한계시록 3장 12절).
기둥을 기념하며
우리 일행은 다음 순례의 길을 위해 다시 차에 올랐다. 다음 행선지인 사데 교회를 향해서 달려갔다. 점점 날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밖은 차가운 겨울 날씨였다. 달리는 차 속에서 나의 뇌리에는 어두침침하게 보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두 개의 기둥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신약교회 공동체의 기둥엔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순례의 길에서 확인하였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통해서, 사랑의 공동체로 믿음을 굳게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신다. 그리고 그 교회를 모델로 보여주시는 것만 같다. 이런 신약교회의 정신이 급 물살을 타고 오랜 세월 동안 사도행전 29장을 써나간 것이라 믿는다.
교회의 모든 것이 역사 속에서 무너지고 사라졌지만, 여전히 서 있는 두 개의 기둥은 마치 ‘사’ ‘랑’이란 두 글자를 상징하듯이 남아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순례자들에게 보여주며 우리 교회로 하여금 사도행전 29장을 지속해서 써나가도록 하는 것만 같다.
지인의 카톡 프로필에 이런 글이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핑계를 찾고 사랑하면 방법을 찾는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보여준 신약교회의 모습엔 사랑하기에 구원할 방법을 찾는 두 기둥의 뚝심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면서 살아 있으면서 죽은 교회의 모습이 몹시 궁금해졌다.